한 사람의 떨리는 목소리가 문 앞에 놓이기까지
어느 날, 한 주부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모님, 저희 우유를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회사가 많이 어려워져서요. 대리점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혹시 구독을 조금만 더 연장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유 대리점 사장이었다.
그의 말은 자꾸 끊겼다.
호흡은 고르지 못했고, 목소리는 눈에 보일 만큼 떨렸다.
분명 구독 연장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단순한 영업 전화로 들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마치 한 사람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손으로 바짓자락을 붙잡은 채,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제발 한 번만 도와달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우유값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웠다. 장을 볼 때마다 가격표를 한 번 더 살펴야 했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담은 뒤 자신의 것은 조용히 내려놓는 날이 많았다.
통장에서는 매달 같은 날짜에 돈이 빠져나갔고, 생활비는 언제나 계산보다 빠르게 줄어들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살림이었지만, 그 평범함을 유지하는 일에도 적지 않은 힘이 들었다.
그녀는 이미 구독을 중단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사장님, 말씀은 잘 알겠는데요. 저도 요즘 사정이 좋지 않아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그러나 남자는 쉽게 전화를 끊지 못했다.
한 번만 더 생각해달라고 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무언가를 삼키듯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른이 된 남자가 낯선 사람에게 ‘제발’이라는 말을 건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을까.
그에게 가족이 있는지 밀린 임대료가 있는지 직원들의 월급을 걱정하고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대리점 문을 닫으면 무엇을 잃게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다.
삶은 때때로 성실한 사람에게도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운다. 아무리 부지런히 살아도 빚은 줄지 않고, 매출은 떨어지며, 바카라임져야 할 사람은 그대로 남는다.
집에서는 괜찮다고 말하고 나왔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곧 나아질 것이라고 가족을 안심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 남은 순간에는 누구에게라도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남자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싱크대 앞에 서 있었고, 식탁에는 다 마시지 못한 물컵과 아이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가 남아 있었다.
빨래는 아직 개지 못했고, 냉장고 안에는 며칠 안에 먹어야 할 반찬들이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집 안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모든 것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였다.
누군가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가족의 생계를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서기가 쉽지 않았다.
몇 분 뒤, 그녀는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아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아까는 너무 죄송했어요. 제가 길게는 못 하고…… 1년만 연장할게요. 정말 많이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녀가 한 일은 우유 구독을 1년 연장한 것이 전부였다. 큰돈을 건넨 것도 아니고, 그의 대리점을 구해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마치 무너지는 지붕 아래에서 작은 기둥 하나를 얻은 사람처럼 감사해했다.
“제가 큰 도움은 못 드리지만, 사장님 꼭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눈가가 뜨거워졌다.
요즘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버티느라 다른 이의 사정을 들여다볼 여유를 잃었다.
누군가는 도움을 청하는 일이 부끄럽고, 누군가는 손을 잡아주고 싶어도 자신의 형편을 먼저 계산해야 한다.
세상이 차가워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차가워졌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두가 너무 무거운 것을 들고 살아가느라 잠시 서로를 돌아볼 손이 비어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그녀에게 문 앞에 놓인 우유는 예전과 달라 보였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상품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가족에게 생활비를 가져가기 위해 새벽길을 달린 흔적이었고, 폐업하지 않기 위해 견뎌낸 하루였으며,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던 한 사람의 바카라임이었다.
그녀는 그날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가족이 조금 더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또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을 때, 자신의 사정을 먼저 헤아리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조금 더 오래 그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현관문 앞에는 우유가 놓여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우유 한 병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차갑고 작은 병 하나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그 안에는 우유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남자가 끝내 놓지 못한 삶과
한 가족에게 돌아가야 할 하루와
누군가에게는 차마 꺼내기 어려웠던 ‘제발’이라는 말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녀는 우유를 품에 안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만큼은
세상 어딘가에서 홀로 버티고 있는 누군가의 숨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