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금욕이 아닌 합일, 억압이 아닌 변형

by이호창

1-3.5. 금욕이 아닌 합일, 억압이 아닌 변형



우리가 흔히 ‘영적인 길’을 떠올릴 때면, 종종 세상의 즐거움을 멀리하고 욕망을 억누르는 엄격한 금욕 (禁慾)의 이미지를 그리곤 합니다.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이나 떨쳐내기 힘든 욕망들을 마치 적 (敵)처럼 여기고, 그것들을 없애거나 억압 (抑壓)하는 것이 곧 수행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많은 종교나 수행 전통에서는 세속적인 삶과의 단절이나 자기 부정 (否定)을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이러한 길들은 분명 깊은 지혜와 가치를 담고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내면의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길이 반드시 금욕과 억압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모든 에너지, 심지어 가장 다루기 힘들다고 여겨지는 욕망이나 감정까지도 끌어안아, 그것을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동력 (動力)으로 삼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 (Tantra)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관점입니다. 탄트라는 무조건적인 금욕이나 맹목적인 억압 대신,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변형 (變形)’시키는 지혜를 통해 궁극적인 ‘합일 (合一)의 경지’에 이르고자 합니다.


억압의 그림자와 변형의 빛


우리 안에는 실로 다양한 힘들이 꿈틀거립니다. 배고픔, 잠자고 싶은 욕구 같은 기본적인 생존 본능에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야망, 때로는 격렬한 분노나 슬픔, 심지어 성적인 충동까지. 이러한 에너지들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슬롯적인 통념이나 도덕적인 잣대에 따라 이러한 에너지들 중 일부를 ‘나쁜 것’, ‘세속적인 것’, ‘영적이지 못한 것’으로 분류하고 억누르려 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누른다고 해서 그 에너지가 사라질까요? 마치 용수철을 억지로 누르면 언젠가 더 강하게 튀어 오르듯이, 억압된 에너지는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억눌린 분노는 까닭 없는 짜증이나 우울감으로 나타날 수 있고, 죄바카라감 속에 억압된 욕망은 오히려 더 비뚤어진 형태로 분출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내면의 싸움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스스로를 ‘좋은 나’와 ‘나쁜 나’로 분열시켜 온전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영적인 나’와 ‘세속적인 나’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어, 삶 전체를 통합적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탄트라는 이러한 억압의 방식 대신 ‘변형’이라는 연금술 (鍊金術)적인 접근을 제시합니다. 탄트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안의 모든 에너지는 근본적으로 신성한 생명력, 즉 샤크티 (Śakti)의 다른 모습입니다. 에너지는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순수한 에너지가 ‘나’라는 분리된 생각 (에고)의 필터를 통과하면서 이기적인 욕망이나 파괴적인 충동으로 왜곡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탄트라는 에너지 자체를 부정하거나 없애려 하는 대신, 먼저 그 에너지가 존재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자각), 그 에너지의 뿌리와 본질을 깊이 이해하며 (지혜), 나아가 그 힘을 파괴적이거나 이기적인 방향이 아닌, 오히려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롭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으로 향하게 하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돌리는’ (변형) 법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마치 거친 강물의 물길을 막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댐을 건설하고 수로를 만들어 그 거대한 힘을 전기를 생산하거나 농사를 짓는 데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원유 (原油)를 불순하다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제 (精製) 과정을 통해 귀한 연료와 재료를 얻어내는 연금술과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성공하고 싶은 강한 야망의 에너지는, 그것이 이기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차리고 정화한다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불의 (不義)를 보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에너지는, 파괴적인 폭력으로 분출되는 대신, 슬롯 정의를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는 힘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성적인 에너지는 단순한 쾌락 추구를 넘어, 깊은 친밀감과 연결감을 나누고 창조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신성한 힘으로 존중받고 활용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탄트라는 우리 안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안아, 그것을 통해 더욱 온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창조하도록 이끕니다.


금욕 너머의 온전한 합일


이러한 ‘변형’의 관점은 자연스럽게 ‘금욕’에 대한 탄트라의 독특한 입장으로 이어집니다. 탄트라는 세속적인 삶이나 육체적인 경험을 무조건 부정하고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 자체가 신성한 에너지의 표현이며, 우리의 몸과 감각이야말로 그 신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통로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탄트라의 목표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일상의 경험 전체를 통해 ‘합일의 경지’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욕망에 대한 무분별한 탐닉이나 방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탄트라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쾌락 추구가 아니라, 모든 경험 속에서 ‘깨어있는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그 경험을 통해 더 깊은 진실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그저 맛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맛을 온전히 느끼는 감각적인 경험 속에서 생명의 신비와 우주와의 연결됨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단순한 감정적인 의존이나 집착을 넘어, 서로의 신성함을 발견하고 함께 성장하는 영적인 교감을 추구합니다.

탄트라는 삶의 어떤 부분도 ‘영적이지 않다’고 배제하지 않습니다. 일하는 것, 먹는 것, 잠자는 것, 관계 맺는 것, 심지어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는 경험들까지도 모두 ‘합일의 경지’로 나아가는 수행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요가가 때로는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규율 (야마, Yama / 니야마, Niyama)을 통해 수행의 기초를 다진다면, 탄트라는 그 규율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되, 궁극적으로는 모든 경계를 넘어 삶 전체를 신성한 유희 (遊戱, 릴라, Līlā)로 받아들이는 포용적인 태도를 지향합니다.

결국 탄트라가 추구하는 것은 금욕을 통한 분리가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 ‘온전한 합일’입니다. 억압을 통해 에너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변형을 통해 에너지를 신성한 목적을 위해 되살리는 것입니다. 이 길은 때로는 용기와 깊은 자기 성찰, 그리고 무엇보다 숙련된 안내자의 지도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이 길은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든 측면을 부정하지 않고도, 바로 지금 여기의 삶 속에서 완전한 자유와 기쁨, 즉 ‘합일의 경지’를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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