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본래 하나다”라는 진실은 특정 문화나 특정 시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우주와 의식의 근본적인 속성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시간과 장소를 넘어 진리를 탐구하는 모든 깊은 사유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어야만 합니다.
놀랍게도 사실이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가 ‘동양’과 ‘서양’이라고 임의로 그어놓은 지리적, 문화적 경계선은 이 근원적인 진실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류의 영적 스승들은 피부색과 언어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같은 산의 정상을 서로 다른 길에서 바라보듯, 정확히 동일한 하나의 체험을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라는 분리된 자아의 감옥이 환상임을 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옥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 개인이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우주적 합일 (Cosmic Unity)’의 경이로운 체험이 있음을 한목소리로 증언합니다. 학자들은 이처럼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핵심적인 지혜를 ‘영원한 철학 (Philosophia Perennis)’이라고 부릅니다.
이 영원한 철학의 심장은, 눈에 보이는 이 분리된 만물의 세계 너머에,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보이지 않는 ‘하나의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본질이 바로 그 ‘하나의 실재’와 동일하다는 깨달음입니다.
동양의 지혜: ‘나’는 곧 우주라는 깨달음
이 ‘하나됨’의 사상은 동양의 정신 세계, 특히 인도의 사상에서 가장 정교하고도 대담한 형태로 꽃을 피웠습니다.
고대 인도의 현자들은 힌두교 (Hinduism)의 근간이 되는 경전인 『우파니샤드, Upaniṣad』를 통해 그들의 깊은 깨달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이 우주 만물을 지탱하는 단 하나의 근원적인 실재를 ‘브라흐만 (Brahman)’이라고 불렀습니다. 브라흐만은 특정한 인격을 가진 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에 스며 있으며, 모든 것을 낳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일무이한 ‘우주적 원리’ 그 자체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육체나 생각, 감정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나’의 껍질들 너머에, 결코 변하지 않는 순수한 의식의 중심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아트만 (Ātman)’이라고 불렀습니다. 아트만은 개인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참된 나’입니다.
여기서 인도의 현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와 나의 참된 본질이 정확히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론 (不二論)’, 즉 비이원론 (Advaita Vedānta,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핵심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는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Tat Tvam Asi, 땃 뜨밤 아시)”라는 가르침은 이 깨달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말은 ‘너’라는 분리된 존재가 저 멀리 있는 ‘그것 (우주)’과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너’라는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그리고 영원히, ‘그것’이라는 우주적 실재와 완전히 동일하다는 충격적인 진실의 선포입니다. ‘나’라는 감옥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내가 곧 우주 전체라는 자각입니다.
불교 (Buddhism)는 이 진리에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합니다. 힌두교가 ‘참된 나(아트만)’를 긍정하고 그것이 우주(브라흐만)와 같다고 선언한 반면, 불교는 그 ‘참된 나’라는 관념 자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석가모니 붓다 (Śākyamuni Buddha)는 ‘나’라고 부를 만한 고정된 실체가 과연 존재하는지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나’를 이루는 요소들을 물질 (몸), 느낌, 생각 (인식), 의지 (심리 현상들), 의식이라는 다섯 가지 무더기 (五蘊, 오온)로 나누어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영원하고 독립적이며 변하지 않는 ‘나 (아트만)’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나’는 그저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조건에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아 (無我, Anattā, 아낫따)’ 사상입니다.
대승불교 (Mahāyāna Buddhism)는 이 ‘무아’의 논리를 ‘나’라는 존재에서 우주 만물 전체로 확장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공성 (空性, śūnyatā, 슈냐따)’ 사상입니다.
‘공 (空)’이라는 말은 그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 (Nihilism)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흔한 오해입니다. 불교에서 ‘공하다’는 말은, ‘그것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컵’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것을 ‘컵’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컵은 ‘컵’이라는 고유한 본질 (자성, 自性, Svabhāva)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컵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흙, 물, 불, 도공의 기술, 컵을 담는 공간, 그리고 그것을 ‘컵’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인식까지, ‘컵이 아닌’ 수많은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 모든 ‘컵이 아닌’ 요소들을 하나씩 빼낸다면, ‘컵’이라는 독립적인 실체는 어디에도 남지 않습니다. 즉, 컵은 ‘컵 아닌 모든 것’들에 의지해서만 잠시 ‘컵’으로 존재합니다. 컵은 ‘독립적인 컵의 실체’가 ‘공 (空)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성’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이것을 ‘연기 (緣起, Pratītyasamutpāda, 쁘라띠뜨야사뭇빠다)’라고 부릅니다. 나가르주나 (Nāgārjuna, 용수)는 “연기이기에 곧 공성이며, 공성이기에 곧 연기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비어 있음 (공)’과 ‘서로 의지하여 일어남 (연기)’은 정확히 같은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나’라는 실체가 공(空)하고, 모든 만물이 공(空)함을 꿰뚫어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와 ‘너’를 가르던 견고한 경계선이 본래부터 실체가 없는, 생각으로 그은 선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나’라는 존재가 본래 독립적이지 않고, ‘너’와 ‘세상’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함을 깨닫습니다. 내가 들이마시는 이 공기가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고, 저 태양 빛이 없으면 내가 먹을 식물이 자랄 수 없습니다.
‘나’를 지키려던 이기심의 근거가 논리적으로 사라집니다. ‘나’라는 분리된 실체가 본래 없는데, 무엇을 위해 싸우고 무엇을 지켜야 한단 말입니까?
그때 남는 것은, 모든 존재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존재한다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 그물망’에 대한 전면적인 자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 (慈悲, Karuṇā, 카루나)’의 근원입니다. 자비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다’는 도덕적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와 ‘너’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진실 (공성)을 꿰뚫어 본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가장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이처럼 힌두교가 ‘나는 우주다’라는 긍정의 길을 통해 합일에 이른다면, 불교는 ‘나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라는 부정의 길을 통해, 정확히 같은 ‘하나됨’의 자리에 도달합니다. 두 길 모두 ‘나’라는 감옥을 허무는 열쇠입니다.
서양의 지혜: ‘나’는 우주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여정
서양의 비밀스러운 가르침 (esoterism, 에소테리즘) 역시 이 ‘우주적 합일’을 궁극의 목표로 삼습니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은 종종 동양과는 다른 형태를 띱니다. 동양이 ‘내가 본래 우주였음’을 깨닫는 정적인 자각을 강조한다면, 서양은 종종 ‘분리된 내가 우주의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역동적인 여정으로 이 과정을 묘사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 철학자 플로티노스 (Plotinus, 204-270)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를 ‘일자 (一者, Hen, 헨)’라고 불렀습니다. ‘일자’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지만, 말이나 생각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입니다. 이 ‘일자’로부터 빛이 흘러나오듯, 정신 (Nous)과 영혼 (Psyche),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질세계 (Physis)가 단계적으로 ‘흘러나왔다 (유출)’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 물질세계에 거주하면서, 자신이 본래 흘러나왔던 저 높은 근원을 잊어버리고 분리감에 빠졌습니다.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구원은, 이 영혼이 다시 내면으로 방향을 돌려 자신의 근원인 ‘일자’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여정의 정점에서 영혼은 ‘일자’와 황홀하게 하나가 되는 합일, 즉 ‘헤노시스 (Henosis)’를 체험합니다. ‘나’라는 개별적인 의식이 녹아내리고, 그 근원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합일’의 사상은 서양의 또 다른 비밀 전승인 영지주의 (Gnosticism, 그노스티시즘)에서도 발견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물질세계가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악한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감옥’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저 너머의 진정한 ‘참된 신’으로부터 온 ‘신성한 불꽃 (Pneuma, 프네우마)’이 갇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에게 구원이란, 이 세상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지 (Gnosis, 그노시스)’, 즉 ‘앎’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여기서 ‘앎’이란,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왜 이 감옥에 갇혔으며, 어떻게 나의 본래 고향(신성한 세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앎’ 자체가 갇혀 있던 신성의 불꽃을 해방시켜, ‘나’라는 존재를 물질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본래의 ‘신성한 전체’와 다시 합일하게 만드는 열쇠였습니다.
기독교의 신비주의 (Mysticism) 전통 안에서도 이 ‘우주적 합일’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중세의 위대한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1328)는 “신과 나의 바탕은 하나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즉 ‘혼의 바탕 (Grund der Seele)’에는 창조되거나 변하지 않는 신성 (神性)이 자리하며, 이 바탕은 신의 본질과 동일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내가 신을 보는 눈과 신이 나를 보는 눈은 정확히 같은 하나의 눈이다”라는 말로, ‘보는 나’와 ‘보이는 신’이라는 이분법적인 분리가 사라진 합일의 경지를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인도의 현자가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선언한 것과 정확히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의 정상, 다양한 길
이처럼 동양과 서양의 가장 깊은 지혜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비유를 사용하지만, 결국 하나의 지점을 가리킵니다.
인도의 현자는 ‘나’의 본질인 아트만이 본래 우주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동일함’을 깨닫습니다. 불교의 수행자는 ‘나’라는 실체가 본래 ‘공’함을 깨달아 모든 존재와 ‘하나’임을 자각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는 개별 영혼이 내면으로 상승하여 궁극의 ‘일자’와 다시 ‘합일’합니다. 영지주의자는 ‘앎’을 통해 내면의 신성한 불꽃이 본래의 ‘전체’로 ‘복귀’합니다. 기독교의 신비가는 ‘혼의 바탕’에서 ‘나’와 ‘신’이 ‘하나임’을 체험합니다.
‘동일함’이든, ‘합일’이든, ‘복귀’이든, 그 모든 체험의 핵심에는 공통된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좁은 경계선, 즉 분리된 자아의식이 녹아내리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나’의 죽음을 통과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감옥이 본래 환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이 걷힌 자리에 남는 것, 그것이 바로 ‘우주적 합일’의 체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어야 할 철학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분리된 존재가 결국 돌아가야 할, 우리의 본래 모습이자 유일한 진실입니다. 동양과 서양은 이 하나의 진실 앞에서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