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우니오 미스티카 (신비로운 합일)

by이호창

에필로그 : 우니오 미스티카 (신비로운 합일)



기독교 신비주의는 이성을 폐기하고 맹목적인 감정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반지성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참된 신비는 인간이 지닌 지성의 극한까지 도달한 이후에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거룩한 침묵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1274)는 평생에 걸쳐 치밀하고 방대한 논리의 체계를 세웠으며 인간의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인식의 단계까지 사유를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는 자신이 작성한 모든 신학적 성취를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며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이성의 무용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무한한 사랑과 진리 앞에서는 유한한 인간의 언어와 논리가 필연적으로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깨달음입니다. 현대 슬롯는 모든 현상을 수치화하고 해체하는 차가운 과학적 합리주의와 이성을 배제한 채 개인의 감정적 도취만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종교적 열광주의로 극단적인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극화된 시대 속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이성의 예리한 분별력과 영혼의 뜨거운 열망이 완벽하게 결합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진정한 신비주의자는 이성을 회피하는 자가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철저하게 직시하고 그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한 사랑을 향해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는 자입니다. 인간의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신의 언어가 시작되며 그 신의 언어는 교리가 아니라 온전한 사랑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이성과 영성의 통합은 필연적으로 내면의 관상을 넘어 세상 속의 치열한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신과의 온전한 연합을 뜻하는 우니오 미스티카 (Unio Mistica)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이기적인 영적 도피가 아닙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Francis of Assisi, 1181-1226)는 깊은 기도의 절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직후 자신이 가장 혐오했던 나병 환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곪은 상처를 씻어주었습니다. 그의 신비 체험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가장 치열한 연민과 행동으로 발현되었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 역시 영적인 안식을 누리는 거룩한 여가의 시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고요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잉태한 신성한 사랑을 이웃을 섬기고 세상을 구원하는 거룩한 사역으로 출산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가장 깊은 차원의 관상은 반드시 가장 구체적인 현실의 실천을 동반하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 하강하는 행위는 곧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나아가는 행위와 동일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개인의 심리적 평안을 얻거나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사적인 치유의 도구로 소비합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 신비주의는 신과 연합한 영혼이 이웃의 고통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윤리적 주체로 변화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을 향한 수직적인 열망이 이웃을 향한 수평적인 섬김으로 전환될 때 영성은 비로소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게 됩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철저하게 기독교 교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려는 공통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채택했던 수행의 과정이나 구체적인 방법론 그리고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 등에는 불교나 힌두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고대 신앙들이 간직해 온 인류 보편적인 원형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비주의자들이 특별히 다른 종교의 사상을 연구하거나 외부의 철학을 차용해서 얻어낸 결과가 아닙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 (Carl Jung, 1875-1961)이 인류의 무의식을 설명했던 것처럼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심성의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에 각 종교의 영적 전통이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절대자를 향해 나아갈 때 자아를 비워내고 고도의 집중 상태에 이르는 심리적 궤적은 종교의 장벽을 넘어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보편적인 본성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비주의의 형식적 유사성은 혼합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동일한 심리적 구조를 가진 인간이 창조주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심성에 기반한 수행 방식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비주의는 정통과 이단을 분별하는 엄격하고 분명한 기준을 확립합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결코 지우지 않습니다. 동방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신화 (神化) 즉 인간이 신의 본성에 동참하게 된다는 테오시스 (Theosys)의 개념 역시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본래의 유한한 한계를 유지한 채 신의 은총 안에서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 1548-1600)는 우주 만물 자체를 신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자연주의와 범신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창조주와 창조 세계의 질적 차이를 무너뜨리고 인간을 신적 존재로 환원하는 심각한 오류를 낳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이 사라지면 예배의 대상과 주체도 사라지며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자기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참된 신비주의는 신의 절대적인 타자성 앞에서 인간의 철저한 의존성을 고백하는 겸손의 자리에서 출발하며 그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건너갈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정통 기독교 신비주의는 십자가의 고난과 자기 부인을 우회하는 어떠한 영적 지름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엠마 커티스 홉킨스 (Emma Curtis Hopkins, 1849-1925)로 대표되는 현대의 신사상 운동이나 뉴에이지 영성은 인간의 본성적 타락과 세상의 구조적 고통을 단순한 마음의 환영으로 치부합니다. 그들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현실의 부를 얻고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만을 영적 진보의 척도로 삼으며 십자가의 고통을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킵니다. 이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제거한 채 대중에게 거짓된 위로를 판매하는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참된 영적 상승은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정화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이루어집니다. 고통을 회피하는 가벼운 영성은 결코 부활의 찬란한 영광에 도달할 수 없으며 거짓된 빛을 쫓는 영혼은 결국 더 깊은 허무로 떨어지게 됩니다.

더불어 주관적인 영적 체험이 객관적인 도덕률을 파기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십육 세기 스페인에서 활동했던 알룸브라도스 이단은 자신들이 이미 특별한 은총의 단계에 도달하여 성령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었으므로 어떠한 육체적 방종이나 도덕적 타락도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영적 교만이 낳은 가장 파괴적인 형태의 자기 합리화입니다. 신의 거룩한 빛에 가까이 다가간 영혼일수록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미세한 죄악까지 철저하게 인식하며 세상과 이웃을 향해 더욱 엄격한 윤리적 바카라임을 짊어집니다. 참된 신비 체험은 인간을 도덕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방종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으로 인간의 의지를 강권합니다. 영적 체험의 진정성은 황홀경의 강도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맺히는 성결한 삶의 열매로 증명됩니다.

이처럼 철저한 신학적 분별과 경계 위에서 성립하는 신비주의는 소수의 특별한 종교적 천재들만이 획득할 수 있는 독점적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우리가 매일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남루한 일상 속으로 온전히 육화되어야 합니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 (Benedict of Nursia, 480-547)는 엄격한 육체적 노동과 규칙적인 기도의 리듬을 통해 수도사들의 단조로운 일상을 거룩한 예배의 처소로 승화시켰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거친 땅을 파고 밭을 가는 쟁기와 성전에서 암송하는 기도의 성무일도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동일한 무게를 지닌 신성한 도구였습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 (Hildegard of Bingen, 1098-1179)는 우주 만물 속에 깃든 하나님의 생명력 즉 비리디타스라는 푸르른 창조의 힘을 직관했습니다. 그녀의 영적인 눈에 비친 세상은 의미 없이 버려진 물질적인 껍데기가 아니라 창조주의 지혜와 숨결이 진동하는 장엄한 두 번째 성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은 화려한 성전의 지성소에만 박제되어 있지 않고 우리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현장과 자연의 미세한 떨림 속에도 충만하게 현존하며 우리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비주의가 현대인들에게 남기는 위대한 유산은 세상을 도피하는 지식이 아니라 일상의 권태를 뚫고 나오는 치열한 영성의 회복입니다. 밖으로만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들여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직시할 때 현대인들은 상실했던 참된 자아를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함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 텅 빈 내면을 창조주의 사랑으로 채우는 과정은 그 자체로 존재의 완전한 안식을 가져다줍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절대자와 연합한 영혼만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분열된 세상을 치유하는 생명의 통로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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