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세기와 십구 세기 초의 영국은 산업 혁명의 기계적 세계관과 계몽주의의 합리성이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는 아이작 뉴턴과 존 로크 등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이성 중심주의를 향해 전면적인 사상적 공격을 가했습니다. 그는 모든 현상을 물질의 수학적 배열로 환원하는 합리주의가 인류의 영적 지각 능력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질병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역시 이러한 이성주의에 굴복하여 이신론 (理神論, Deism)의 형태로 변질되었다고 그는 분석했습니다. 이신론은 우주를 창조한 뒤 일정한 물리적 법칙과 도덕적 규칙만을 남겨두고 멀리 물러나 있는 차가운 절대자를 상정합니다. 블레이크는 이러한 억압적인 종교 체계와 이성주의를 동시에 해체하고 기독교의 참된 영적 역동성을 복원하기 위해 ‘예언서 (Prophetic Books)’라는 방대한 자신만의 신화적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가 명명한 예언서는 일반적인 소설이나 논문과 같은 단일한 형태의 텍스트가 아닙니다. 이것은 1789 년경부터 생애 마지막까지 평생에 걸쳐 써 내려간 일련의 시적이자 신화적인 작품군을 통칭하는 이름입니다. 블레이크는 글과 그림을 동판에 함께 새겨 인쇄한 뒤 직접 붓으로 색을 입히는 독창적인 인쇄 방식을 창안하여 이 작품들을 스스로 제작했습니다. 그의 예언서는 『티리엘, Tiriel』과 『텔의 바카라, The Book of Thel』을 시작으로 『아메리카 예언, America a Prophecy』과 『유럽 예언, Europe a Prophecy』 등의 대륙 시리즈로 확장됩니다. 이후 『유리즌의 바카라, The Book of Urizen』과 같은 본격적인 신화적 서사를 거쳐 가장 방대하고 완성도 높은 『밀턴, Milton』과 『예루살렘 거인 알비온의 발현, Jerusalem The Emanation of the Giant Albion』으로 완성됩니다. 이 작품들은 각각 독립적인 서사를 지니면서도 전체가 정교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신화 체계를 이룹니다. 이 체계 안에는 억압적 이성을 상징하는 유리즌 (Urizen), 영적 창조를 수행하는 로스 (Los), 그리고 체제에 항거하는 혁명적 에너지를 상징하는 오크 (Orc) 등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통제하려는 세력과 치열한 투쟁을 전개합니다. 각 권은 단순한 시집을 넘어 당대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영적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각적 예술품이자 철학적 선언문입니다.
이 방대한 예언서 서사에서 묘사하는 인류의 비극은 창세기에서 말하는 도덕적 불순종이 아닙니다. 그가 정의하는 진정한 타락은 인간의 무한한 지각 능력이 극도로 축소되고 단절되는 인식론적 붕괴 현상입니다. 그는 타락 이전의 완전하고 통합된 인간의 상태를 알비온 (Albion)이라는 우주적 거인의 형태로 설명합니다. 알비온은 신성한 지성, 감정, 육체, 그리고 상상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본연의 인류 전체를 의미합니다. 타락은 이 알비온의 내면을 구성하는 영적 기능들이 서로 분열하여 주도권 다툼을 벌일 때 발생합니다. 통합된 자아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인간은 무한한 영적 현실을 감각하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을 우주와 분리된 고립된 개체로 인식하게 되고 좁고 제한적인 물리적 오감의 틀에 갇혀 물질세계를 유일한 현실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분열과 타락의 상태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원흉이 바로 유리즌입니다. 서양의 정신사에는 창조를 축복이 아닌 억압으로 규정하는 독특한 시각이 존재합니다. 이 시각은 물질세계를 통제하는 권위적인 창조자를 상정합니다. 블레이크의 유리즌은 초기 기독교 이단 분파였던 영지주의 (靈知主義, Gnosticism)의 데미우르고스 (Demiurge), 그리고 구약성서의 야훼 (Yahweh)와 함께 억압적 창조자의 계보를 형성합니다. 세 존재는 모두 우주를 설계하고 규칙을 제정한 자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들은 인간을 영적인 자유로 이끄는 대신 특정한 법칙과 물질의 한계 속에 가둡니다. 인간은 이들의 지배 아래에서 육체적 제약과 도덕적 의무를 짊어집니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세 창조자는 각기 다른 철학적 배경과 목적을 지니고 세계를 통치합니다.
구약성서의 야훼는 도덕적 언약과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인격신으로 등장합니다. 야훼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언어로 세상을 창조한 유일신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명확한 금기를 설정하여 행동의 한계를 긋습니다. 야훼의 통치 방식은 엄격한 율법을 통해 인간의 삶을 규제하는 모습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는 계약을 준수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내리지만 규칙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가차 없는 형벌을 가합니다. 이는 창조의 목적이 피조물의 철저한 복종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야훼는 선과 악의 기준을 독점하며 인간이 그 기준을 벗어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야훼가 설정한 도덕적 질서와 권위는 영지주의에 이르러 근본적인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창조신을 완전한 참된 신과 분리하여 데미우르고스라는 열등한 존재로 격하합니다. 데미우르고스는 물질세계를 창조한 기술자이지만 그 자신은 영적 세계의 최고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불완전한 파편입니다. 그는 자신이 유일한 신이라는 무지한 착각 속에 빠져 물질이라는 장벽을 만들고 인간의 영혼을 육체 안에 가두어버립니다.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창조는 신성한 계획이 아니라 비극적인 오류입니다. 구약의 야훼가 도덕적 규칙으로 인간을 통제했다면 데미우르고스는 물질의 무게와 육체의 굴레를 통해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던 신성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구원은 창조자가 만든 물질세계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지를 극복하고 본래의 신성으로 돌아가는 깨달음에 있습니다.
영지주의가 창조신을 물질적 결핍의 상징으로 보았다면 블레이크는 이를 인간 내면의 심리적 억압으로 치환하여 유리즌의 통치를 설명합니다. 유리즌은 데미우르고스처럼 오만하고 야훼처럼 억압적이지만 그가 사용하는 통제 수단은 이성과 측량입니다. 예언서 신화에서 유리즌은 무한한 영적 세계에 측량기를 들이대어 한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통제 가능한 물질적 단위로 분할합니다. 그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흐르는 세계를 거부하고 콤퍼스와 직각자를 들고 우주를 재단하여 고정된 경계를 짓는 건축가입니다. 합리적인 법칙만을 진리로 규정하며 상상력 같은 인간의 본성을 혼돈으로 간주하여 탄압합니다. 야훼의 율법이 도덕적 통제를 목적으로 하고 데미우르고스의 물질이 영혼의 망각을 유도한다면 유리즌의 이성은 인간의 무한한 창조적 가능성을 제거하는 차가운 폭력입니다. 정통 교회가 이 유리즌적 도덕률과 교리를 슬롯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억압합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 끝없는 죄바카라감을 주입하고 영적인 생명력을 고갈시킵니다. 이성의 굴레 아래에서는 순종과 형벌이라는 억압적 기제만 작동할 뿐 진정한 구원이나 해방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 창조자는 권력의 속성과 억압의 방식을 각기 다르게 표출합니다. 이들의 존재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하는 절대적 통제 권력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 수렴됩니다. 야훼는 윤리적 계약을 명분으로 인간의 자율성을 제한하고 율법 아래 인간을 종속시킵니다. 데미우르고스는 도덕적 심판관이 아니라 무지한 조물주로서 기능하며 인간을 물질적 한계 속에 가두어 영적 고립을 강제합니다. 나아가 유리즌은 외부의 신적 존재를 넘어 인간 내부의 경직된 이성과 계산적 사유가 어떻게 스스로를 억압하는 족쇄가 되는지를 명료하게 폭로합니다. 야훼가 두려움을 통한 복종을 목표로 삼았고 데미우르고스가 무지를 통한 속박을 설계했다면 유리즌은 이성이라는 가장 합리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마비시킵니다. 권위적인 율법과 무지한 물질 창조 그리고 차가운 이성의 독재는 모두 인간이 지닌 가능성을 제한하는 억압의 다른 이름입니다. 야훼와 데미우르고스와 유리즌을 교차하여 분석하는 작업은 외부의 억압 체제가 어떻게 인간 내면의 통제 기제로 변모해 왔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절대적인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에 스스로를 묶어 왔습니다.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인간은 다시 물질의 법칙에 얽매이고 물질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은 결국 맹목적인 이성의 틀 안에 갇힙니다. 인간을 한계 짓는 창조자들의 논리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해체할 때 비로소 인간은 물질과 율법과 이성의 테두리를 넘어 상상력과 영적 해방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유리즌의 폭압적인 합리성에 맞서 영적 투쟁을 전개하는 존재가 로스 (Los)입니다. 로스는 타락한 물질세계 내부에서 활동하는 예언자적 정신이자 창조적인 시적 천재 (Poetic Genius)를 상징합니다. 유리즌이 만물을 해체하고 억압하는 동안 로스는 대장간의 용광로 앞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형성하고 구축하는 노동을 수행합니다. 로스의 임무는 물질세계를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물질의 형태 속에 무한한 영적 진리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블레이크는 예술가와 시인이 수행하는 창작 활동을 로스의 거룩한 노동과 동일시했습니다. 참된 예술과 시는 단순한 미적 유희나 감정의 표출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성이 만들어놓은 인식의 한계를 부수고 타락한 인간이 잃어버린 원래의 영적 시야를 회복하도록 돕는 가장 치열하고 실제적인 구원의 방편입니다.
이러한 독창적인 신화적 구조의 정점에는 상상력 (Imagination)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파격적인 기독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통 신학은 예수를 역사적인 도덕 교사나 분노한 신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된 형벌적 대속물로 설명해 왔습니다. 블레이크는 이러한 교리가 유리즌이 만들어낸 또 다른 법적 구속에 불과하다고 일축합니다. 그에게 예수는 ‘신성한 상상력 (Divine Imagination)’ 그 자체의 현현입니다. 블레이크는 신을 인간과 멀리 떨어진 초월적 존재로 상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이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창조적인 상상력 안에 거주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상상력은 인간 안에 현현한 신의 실제적인 몸 (Divine Body)입니다. 무한한 상상력이 제한된 인간의 이성과 물질의 굴레 속으로 직접 들어와 그 결박을 해체하는 사건이 바로 성육신 (成肉身, Incarnation)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곧 이 상상력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블레이크가 말하는 상상력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공상이나 환상을 지어내는 단순한 심리적 기능이 아닙니다. 상상력은 우주와 만물의 영원한 실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세상을 창조하며 유지하는 근원적인 에너지입니다.
신성한 상상력은 이성과 감각이 규정한 한계를 돌파하여 영원한 실재를 포착합니다. 블레이크는 일출을 관찰할 때 물리적인 태양의 떠오름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태양의 빛 속에서 무한한 생명이 약동하며 천사들이 합창하는 영적인 실재를 동시에 목격했습니다. 이것은 병적인 망상이나 문학적인 과장이 아닙니다. 상상력이 제한된 감각의 문을 열고 사물 이면에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를 드러내는 정당한 인식 과정입니다. 블레이크는 이 영적 지각 능력을 사중적 시각 (fourfold vision)이라는 네 단계의 인식 틀로 체계화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인 울로 (Ulro)는 오직 물질의 표면만을 인식하는 단편적이고 기계적인 시야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생성 (Generation)은 생물학적인 본능과 감각에 의존하여 세계를 파악하는 상태입니다. 세 번째 단계인 베울라 (Beulah)는 감정과 애정이 교차하는 꿈과 안식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인 에덴 (Eden) 혹은 영원 (Eternity)은 신성한 상상력이 완벽하게 깨어난 궁극의 시야입니다. 인간은 이 네 번째 시각에 도달할 때 비로소 모든 분열된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합니다. 이 사중적 시각을 회복한 인간은 우주를 파편화된 물질로 보지 않고 살아있는 유기체로 재창조합니다.
이 신성한 상상력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방식은 죄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입니다. 유리즌의 이성적 종교는 외부의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어긴 자를 고발하고 정죄하며 처벌하는 원리로 작동합니다. 반면 상상력으로서의 예수는 이 고발과 형벌의 체계 전체를 무효화합니다. 블레이크의 사상에서 용서는 우월한 권력자가 죄인에게 베푸는 법률적인 사면이나 감정적인 관용이 아닙니다. 참된 용서는 타인의 겉모습과 도덕적 결함을 꿰뚫어 보고 그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신성함을 인식해 내는 상상력의 적극적인 발동입니다. 예수는 이성적 율법이 규정한 선과 악의 이분법을 파괴하고 용서를 통해 산산조각이 난 알비온의 지체들을 다시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결합합니다. 따라서 블레이크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타인을 향해 이 상상력과 용서의 능력을 끊임없이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언서의 서사는 종착지로서 예루살렘의 건축이라는 거대한 영적 과업을 제시합니다. 블레이크가 말하는 예루살렘은 중동의 물리적인 도시나 죽음 이후에 당도하게 될 막연한 내세의 공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억압적인 이성의 법칙이 완전히 소멸하고 신성한 상상력이 인간 슬롯 전반에 완벽하게 구현된 영적 해방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는 이 예루살렘의 건축이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잉글랜드의 현실 공간에서 바로 지금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정치적이고 슬롯적인 혁명을 포함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인류의 인식 체계를 뒤바꾸는 영적 혁명을 요구합니다. 도덕적 검열과 이성적 통제에 의해 억눌렸던 인간의 창조적 욕망이 해방되고 각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예술적이고 영적인 비전을 자유롭게 표현할 때 비로소 타락한 알비온은 원래의 통합된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사유는 굳어진 정통 교리와 메마른 합리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질식시키는지를 분석한 정밀한 진단서로 기능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도덕적 심판자가 아닌 무한한 창조성과 용서를 발휘하는 신성한 상상력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 역동적인 인식 능력의 차원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분리된 거리는 외부 공간에 존재하는 물리적 간극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 능력이 축소된 결과일 뿐입니다. 신성함은 먼 하늘 너머에 있지 않고 이성을 넘어 진실을 직관하는 상상력의 발동과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는 구체적인 용서의 행위 안에 정확하게 존재합니다. 낡은 도덕률의 구속을 과감히 폐기하고 만물에 내재한 무한성을 다시 바라보는 지각의 확장이 인류가 도달해야 할 구원의 참된 실체로 자리매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