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3. 『아우로라, Aurora』

무저갱 (Ungrund)과 신의 자기 계시 욕구

by이호창

4-16.3. 『아우로라, Aurora』 : 무저갱 (Ungrund)과 신의 자기 계시 욕구



야콥 뵈메 (Jakob Böhme, 1575-1624)가 1600년에 겪은 강렬한 빛의 체험은 즉각적인 종교적 선동이나 교파의 창설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우주의 근원적인 질서와 신의 본질을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철저한 내적 침묵과 사유의 숙성 과정을 거쳤습니다. 1612년에 이르러서야 뵈메는 내면에서 형성된 사상적 체계를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그의 첫 번째 저작인 『아우로라, Aurora』입니다. 이 바카라의 원래 제목은 떠오르는 여명 (Morgenröte im Aufgang)이며, 이는 오랫동안 무지와 교리적 오류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인간의 지성에 참된 신적 지혜의 빛이 새롭게 비치기 시작했다는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뵈메는 이 저작을 통해 정통 기독교 신학이 설명하지 못했던 창조의 기원과 악의 발생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독창적인 형이상학적 체계를 세상에 처음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체계의 가장 근원적인 출발점은 무저갱 (Ungrund)이라는 사상적 개념입니다. 무저갱은 독일어로 부정 접두사인 운 (Un)과 바닥 혹은 근거를 뜻하는 그룬트 (Grund)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이는 어떠한 토대나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무 (Nichts)의 상태를 지칭합니다. 뵈메는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의 신을 인격적인 형태나 특정한 속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창조 이전의 원초적인 신성 (Gottheit)은 선이나 악, 빛이나 어둠, 주체나 객체라는 어떠한 이분법적 구별도 발생하지 않은 완벽한 미분화의 상태입니다. 무저갱은 공간적인 깊이를 나타내는 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규정성이 완전히 결여된 절대적 영도 (Zero)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정통 신학이 신을 완전하고 충만한 존재 그 자체 (Esse)로 정의한 것과 달리, 뵈메는 신의 가장 깊은 본질을 ‘규정할 수 없는 없음’으로 정의함으로써 서구 존재론의 전통적인 틀을 전면적으로 해체했습니다.

무저갱의 상태에서 신은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자의식도 갖지 않습니다. 인식이라는 행위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의 구별을 전제로 성립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구분이나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단일성 안에서는 자신을 비추어 볼 대상이 없으므로 신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할 수 없습니다. 뵈메는 이러한 무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정적인 공백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자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맹목적이고 역동적인 갈망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지 (Wille)의 발생’입니다. 무저갱 안에서 원인 없이 스스로 피어오르는 이 근원적인 의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강력한 탐구의 동력입니다.

이러한 근원적 의지는 필연적으로 신의 자기 계시 (Self-revelation) 욕구로 전환됩니다.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과 구별되는 타자적 대상이 필요합니다. 뵈메는 신이 완전한 자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무한한 가능성들을 외부로 펼쳐내어 객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논증했습니다. 즉 창조는 이미 완전한 신이 심심풀이나 여흥으로 세상을 만들어낸 부수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창조는 신이 무저갱의 무의식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인식하고 살아있는 생명으로 완성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존재론적 필연성입니다. 신은 자연과 우주라는 거울을 만들어 그 안에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자신을 신으로 정립하게 됩니다.

이 자기 계시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원리로 작용하는 것이 대립과 갈등의 구조입니다. 뵈메는 단일한 속성만으로는 어떠한 인식이나 현상도 발생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법칙을 확립했습니다. 밝음은 어두움과 대비될 때만 그 밝음을 증명할 수 있으며, 기쁨은 고통의 감각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합니다. 쓴맛과 단맛, 차가움과 뜨거움, 사랑과 분노와 같은 상반된 원리들이 서로 부딪히고 마찰하는 과정에서만 모든 사물의 형상과 성질이 구체화됩니다. 따라서 신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외부 세계를 형성할 때, 그 세계는 필연적으로 상호 대립하는 두 가지 힘의 긴장 관계 속에서 구축되어야만 합니다. 뵈메는 이러한 대립의 원리가 피조물의 결함이나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신의 자기 계시를 위해 우주에 각인된 근본적인 법칙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전통 신학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악의 기원 (Origin of Evil)”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뵈메의 체계에서 어둠과 진노, 그리고 투쟁이라는 부정적인 요소들은 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별개의 악마적 세력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신이 자신의 사랑과 빛을 현현하기 위해 무저갱 안에서 먼저 발생시켜야만 했던 존재의 어두운 바탕입니다. 신의 사랑은 그 자체로는 형태가 없으나, 신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수축하고 저항하는 어두운 성질을 뚫고 나올 때 비로소 타오르는 불꽃과 빛으로 구체화됩니다. 악은 이 과정에서 사랑의 빛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저항하는 어두운 성질이 그 자체로 고립되어 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악과 고통은 창조의 실패가 아니라 신성한 빛이 발현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대립적 배경으로 규정됩니다.

야콥 뵈메가 정립한 대립의 원리와 신의 자기 전개 과정은 19세기 독일 관념론, 특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W.F. Hegel)의 변증법 (Dialektik) 철학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헤겔은 뵈메를 가리켜 독일 철학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칭송하며, 그의 사상 안에 근대 철학의 핵심적인 구조가 온전히 배태되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헤겔 철학의 중심 개념인 절대정신 (Absoluter Geist)은 뵈메가 묘사한 무저갱의 신성과 정확히 구조적 궤를 같이합니다. 헤겔에게 절대정신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자신을 외부로 외화 (Entäußerung)시키고 타자화하는 과정을 거쳐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함으로써 비로소 자의식 (Selbstbewusstsein)을 획득하는 역동적인 주체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립 (Thesis)과 반정립 (Antithesis)이 충돌하여 더 높은 차원의 종합 (Synthesis)으로 나아가는 논리적 전개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 변증법적 사유의 원형이 바로 뵈메의 『아우로라』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뵈메는 아무것도 없는 무저갱의 상태를 최초의 단계인 정립으로 보았고, 그 무저갱 안에서 파생된 의지와 대립적 속성을 갈등의 단계인 반정립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립하는 힘들의 마찰을 거쳐 마침내 신이 자신을 인식하는 살아있는 우주가 탄생하는 과정을 완성의 단계인 종합으로 논증했습니다. 이러한 뵈메의 역동적인 사유 방식은 헤겔의 철학적 체계로 그대로 이식되었습니다. 뵈메는 모순과 대립을 논리적인 오류나 극복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고, 존재가 자신을 전개하고 생명력을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존재론적 동력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 철학을 지배해 온 형식 논리학의 동일률과 모순율을 뛰어넘어, 모순 자체를 실재의 본질로 긍정하는 헤겔의 변증법적 존재론을 탄생시킨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습니다. 신이 유한한 물질세계와 역사 속으로 자신을 던져 그 고통과 대립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한다는 헤겔의 역사철학은, 뵈메의 신지학적 우주론을 세속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로 정교하게 번역한 결과물입니다.

『아우로라』에 담긴 이 방대하고 급진적인 사상은 철학적 정합성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교회 권력과 극심한 마찰을 빚었습니다. 겔리츠 지역의 수석 목사였던 그레고리우스 리히터 (Gregorius Richter)는 뵈메의 원고를 입수한 후 이를 정통 루터교 교리를 파괴하는 끔찍한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정통 교리는 신을 변화가 없는 절대적 완전자로 규정하고 세상의 악을 철저히 인간의 자유 의지 오용에서 비롯된 원죄로 해석합니다. 반면 뵈메의 사상은 신을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존재로 묘사했으며 우주적 갈등의 기원을 신의 내적 본성 안으로 편입시켰습니다. 분노한 리히터의 고발로 인해 겔리츠 시의회는 뵈메를 소환하여 재판을 열었고, 그의 원고를 몰수하는 한편 영구적인 집필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강압적인 조치로 인해 뵈메는 이후 7년 동안 철저한 침묵 속에서 다시 구두 수선공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무저갱의 개념과 신의 자기 전개 논리는 결코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상은 정적인 실체로서의 신을 거부하고 지속적인 자기 분열과 통합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생명 활동으로서의 신을 사유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를 구축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 심연에서 의지가 발생하고 그 의지가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해 대립적인 우주를 산출한다는 뵈메의 우주론은, 무한한 신적 생명이 유한한 물질세계의 마찰을 통해 자신을 완성해 가는 장엄한 존재론적 드라마를 서술합니다.

야콥 뵈메가 『아우로라』를 통해 정립한 무저갱과 자기 계시의 철학은 서구 지성사가 실체론적 사고에서 과정론적 사고로 이행하는 결정적인 사상적 도약대입니다. 신을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현해 나가는 절대적 주체로 파악한 그의 통찰은 인간의 지성이 종교적 맹신을 벗어나 신과 우주의 필연적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가장 치열한 철학적 시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4-16.2. 야콥 뵈메의 은총의 섬광 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