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지적인 침묵과 부정신학

'지푸라기'가 된 언어와 신비의 한계

by이호창

3-9.4. 지적인 침묵과 부정신학 : '지푸라기'가 된 언어와 신비의 한계



1273년 12월 6일 나폴리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예기치 못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평생을 쉬지 않고 방대한 분량의 신학 저술을 쏟아내던 거장이 갑자기 펜을 놓고 침묵에 잠겼습니다. 비서였던 레지날드 (Reginald)가 집필을 계속해달라고 간청했을 때 아퀴나스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짧은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보인다 (mihi videtur ut palea).” 이 선언은 서구 지성사를 지탱해 온 가장 거대하고 정교한 신학적 체계인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이 왜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아퀴나스의 침묵은 지적 능력의 고갈이나 심리적 우울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압도적인 신비 체험 앞에서 터져 나온 지성의 겸허한 자기 고백이자 더 높은 차원의 앎으로 넘어가는 필연적인 도약이었습니다.

아퀴나스가 자신의 저작을 지푸라기에 비유한 것은 단순히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자기비하가 아니었습니다. 중세 농경 슬롯에서 지푸라기는 알곡을 감싸고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되어 알곡을 얻게 되면 껍질인 지푸라기는 그 소임을 다하고 버려지게 됩니다. 아퀴나스는 평생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신의 진리를 규명하고 체계화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가 쌓아 올린 스콜라 신학의 논리는 신앙의 알곡을 보호하고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껍질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사 중에 체험한 신비적 탈혼 상태에서, 그는 신의 본질을 직접 맛보았고 그 순간 자신이 그토록 정교하게 다듬어온 모든 언어와 개념들이 실재 앞에서는 한낱 껍데기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실재를 마주한 자에게 그림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알곡을 얻은 자가 껍질을 내려놓는 자연스러운 완성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퀴나스 신학의 근저에 흐르고 있던 부정신학 (Theologia Negativa)의 흐름을 수면 위로 드러냈습니다. 긍정신학 (Cataphatic Theology)이 신은 선하다거나 신은 지혜롭다는 식으로 신의 속성을 인간의 언어로 규정하려 한다면 부정신학은 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말함으로써 신에게 접근하려 합니다. 아퀴나스는 초기 저작에서부터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오직 무엇이 아닌지만을 알 수 있다’고 천명했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유한한 피조물에서 비롯된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신을 그 안에 가두는 순간 필연적으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을 선하다고 말할 때 그 선함은 인간이 경험하는 유한한 선함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따라서 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진술은 인간의 모든 언어와 개념을 부정하고 넘어설 때 가능해집니다. 아퀴나스에게 신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이자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아퀴나스의 부정신학은 불가지론이나 회의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불가지론이 신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탐구를 포기하는 것이라면 아퀴나스의 부정은 앎의 극한에서 이루어지는 초월적 행위입니다. 그는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와 속성을 치열하게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탐구의 끝에서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스스로 침묵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것은 모르는 상태에서의 침묵이 아니라 너무나 명백하고 거대한 진리 앞에서 압도당해 할 말을 잃은 상태입니다. 아퀴나스는 이를 ‘거룩한 무지’ 혹은 ‘배운 무지 (Docta Ignorantia)’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의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신이 인간의 이해를 영원히 초월해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즉 신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신을 알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앎이야말로 오만을 버린 지성이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입니다.

이 지적인 침묵은 언어의 폐기가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언어 너머의 실재를 지시하는 기능을 합니다. 아퀴나스는 유비 (Analogia)라는 개념을 통해 이 난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신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지만 피조물이 창조주를 닮은 만큼 제한적으로 신을 가리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과 언어 자체 사이에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아퀴나스의 침묵은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실재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경건한 태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신학 체계가 신을 대신하는 절대적인 대상이 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신학은 신을 가리키는 수단일 뿐 신 그 자체가 아닙니다.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절대화하려 할 때 아퀴나스는 과감하게 저술을 중단함으로써 신학이 지향해야 할 대상은 학문적 이론이 아니라 실재하는 하나님임을 몸소 증명했습니다.

현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퀴나스의 침묵은 이 명제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다른 차원을 보여줍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이 논리적 한계 밖의 것에 대한 판단 중지라면 아퀴나스의 침묵은 논리적 한계 너머에 있는 충만한 실재와의 만남에서 오는 경외감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공허한 침묵이 아니라 신의 임재로 가득 채워진 충만한 침묵입니다. 아퀴나스는 이 침묵 속에서 지복직관을 미리 맛보았습니다.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신학대전』의 마지막 부분은 글자가 아닌 여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여백은 후대 사람들에게 어떤 정교한 논리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바카라 속에 갇히지 않으며 인간의 머리로 재단할 수 없는 자유로운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아퀴나스의 말년은 지성 중심의 영성이 단순한 지적 탐구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신비적 합일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그는 이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 능력을 극한까지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성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논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논리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지식을 축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이 지시하는 대상을 사랑하고 그 실재 앞에 머무르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신학적 지식과 개념들은 결국 아퀴나스가 말한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실재인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동안 의지해 왔던 지푸라기마저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정의하고 판단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진정한 앎은 말들의 소음이 멈춘 곳에서 시작된다고 조언합니다. 신비는 분석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남긴 지푸라기 발언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업적이 지향했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그의 신학은 침묵에서 시작해 침묵으로 끝났습니다. 그 침묵은 언어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는 담을 수 없는 신의 말씀이 가장 크게 울려 퍼지는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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