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 길 (Quinque Viae)'을 통해 신에게 나아가기
중세 스콜라 철학의 거장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지성이 신앙의 영역 밖에서 서성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각할 수 있는 물리적 세계의 질서 안에서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실재를 포착해내는 치밀한 지적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그의 대작인 『신학대전, Summa Theologiae』에 기술된 다섯 가지 길 (Quinque Viae)은 흔히 신 존재 증명으로 불리지만 이는 단순히 무신론자를 설득하기 위한 논리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유한한 인간의 이성이 피조물이라는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절대자의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가장 정교하고도 경건한 관조의 여정이었습니다. 아퀴나스에게 세상은 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화살표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성은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며 필연적인 원인을 찾아내는 추적자입니다. 그는 감각 경험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적 원리를 통해 신에게 도달하는 귀납적 상승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 길은 ‘운동 (Motus)’이라는 현상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됩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계승하여 세상의 모든 변화를 운동으로 규정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운동은 단순한 위치의 이동을 넘어, 어떤 사물이 가진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재태 (Potentia)’와 ‘현실태 (Actus)’라는 개념의 정립이 필요합니다. 잠재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나 장차 무엇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이며, 현실태는 그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차가운 물은 현실적으로는 차갑지만 잠재적으로는 뜨거워질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이 물이 실제로 뜨거워지기 위해서는 이미 뜨거운 상태, 즉 현실태로 있는 불과 같은 외부의 작용이 가해져야 합니다. 어떤 사물도 동시에 같은 관점에서 잠재태이면서 현실태일 수는 없으므로,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자가발전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즉, 움직이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타자에 의해 움직여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이 원동력의 계열을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만약 원동자의 사슬이 무한히 계속된다면 최초의 시작점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시작점이 없다면 그로부터 파생되는 중간 단계의 운동도,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운동도 설명할 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논리적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더 이상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절대적인 시발점, 즉 ‘제1 원동자 (Primum Movens)’가 존재해야만 합니다. 아퀴나스는 외부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 부동의 원동자야말로 결핍이나 가능성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현실태 (Actus Purus)’이며, 이것이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존재라고 단언했습니다.
두 번째 길은 ‘능동적 원인 (Causa Efficiens)’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에는 원인과 결과의 질서가 존재합니다. 어떤 결과도 원인 없이 스스로 발생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물이 자신의 원인이 되려면 그 사물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인들의 고리 또한 무한히 소급될 수 없습니다. 최초의 원인이 제거되면 중간 원인도 사라지고 결국 최종적인 결과인 지금의 세계도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원인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모든 원인적 작용의 시발점이 되는 제1 원인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퀴나스는 이 ‘비원인적 원인 (Causa Incausata)’을 신으로 식별했습니다. 이는 우주가 맹목적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정점에 서 있는 절대적 존재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인과론적 접근은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설 (緣起說, Pratītyasamutpāda)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불교 역시 모든 현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통찰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법은 세상 만물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관계망 속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퀴나스와 붓다 모두 눈에 보이는 현상 이면의 인과적 질서를 꿰뚫어 보았다는 점에서 지적인 궤를 같이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그 질서의 끝에서 무엇을 보았느냐에 있습니다. 불교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무시무종 (無始無終)의 관계망을 보았기에 절대적인 제1 원인이나 창조주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아퀴나스는 이 인과 사슬이 무한히 후퇴할 수 없다는 논리적 필연성을 통해, 사슬 밖에서 존재를 지탱하는 절대적 시발점인 신을 요청했습니다. 즉 불교가 수평적인 상호 의존성을 강조했다면, 아퀴나스는 수직적인 존재의 기원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세 번째 길은 ‘우연성 (Contingentia)’과 ‘필연성 (Necessitas)’의 관계를 다룹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우연적인 존재들입니다.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만약 모든 존재가 이처럼 우연적이라면 과거의 어느 시점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지금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세계가 엄연히 실재하므로 모든 존재가 우연적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그 존재의 원인을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필연적 존재 (Ens Necessarium)’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 필연적 존재가 다른 모든 우연적 존재들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근거가 되며 이것이 바로 신입니다. 이 논증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실존적 불안과 의존성을 드러내며 오직 절대자만이 흔들리지 않는 존재의 반석임을 역설합니다.
네 번째 길은 존재의 ‘등급 (Gradus)’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물들 사이에서 더 좋음과 덜 좋음, 더 진실함과 덜 진실함 같은 가치의 등급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비교급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최상급의 기준을 요청합니다. 어떤 것이 '더 뜨겁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뜨거운 것'이라는 기준이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아퀴나스는 이 논증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창조적으로 수용합니다. 플라톤이 모든 선한 것들은 '선의 이데아'를 분유 (participation)함으로써 선해진다고 보았던 것처럼, 아퀴나스 역시 제한적인 완전함을 지닌 피조물들은 그 완전함의 원천인 절대적 완전자로부터 존재를 나누어 받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이를 관념의 세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을 통해 존재론적 증명으로 발전시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장르에서 최대인 것은 그 장르에 속한 모든 것의 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불이 가장 뜨거운 것으로서 다른 모든 뜨거운 것들의 원인이 되듯이, 선함과 진실함, 고귀함의 최대치에 있는 존재는 그보다 덜한 모든 존재들에게 그 성질을 부여하는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의 가치 상대주의는 '좋음'이나 '진실함'을 주관적인 판단이나 문화적 산물로 취급하지만, 아퀴나스에게 이것들은 존재 자체에 내재된 ‘객관적인 속성 (Transcendentalia)’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완전한 선과 진리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 완전함의 원인이자 기준이 되는 '가장 완전한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아퀴나스는 이 절대적인 가치의 원천을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섯 번째 길은 ‘사물의 목적성 (Gubernatio Rerum)’ 즉 목적론적 증명입니다. 우리는 지성이 없는 자연물들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것은 화살 자체의 의지가 아니라 궁수의 의도에 의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적인 능력이 없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정교한 질서 속에서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그들에게 목적을 부여하고 그들을 인도하는 지적인 존재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주의 정교한 질서와 법칙은 우연의 산물일 수 없으며 전 우주를 통치하고 섭리하는 ‘최고의 지성 (Intelligens)’을 요청합니다. 아퀴나스는 이 우주적 설계자를 신으로 규명했습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길은 현대 과학이나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허점이 있어 보일 수 있지만 아퀴나스가 의도한 바는 기계적인 증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논증들을 통해 인간 지성이 감각 세계의 껍질을 뚫고 그 이면에 있는 존재의 근원과 마주하게 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은 차가운 추론의 연속이지만 그 끝에서 인간은 전율에 가까운 경외심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논증들은 결론적으로 인간과 세계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결핍된 존재이며 매 순간 절대자의 의지에 의해 존재를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숨 쉬고 생각하는 이 순간이 나의 능력이 아니라 부동의 원동자이자 필연적 존재인 신의 지속적인 창조 행위 덕분이라는 자각은 지적 탐구를 멈추게 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아퀴나스에게 신을 아는 지식은 신을 사랑하는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모르는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섯 가지 길을 통해 확인된 신은 막연한 감정의 대상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고 존재의 원인을 제공하는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분입니다. 이성은 신의 본질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신이 피조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임을 명확히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성적 확신은 신앙이 맹목적인 미신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고 신비를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제공합니다. 아퀴나스는 지성을 억누르지 않고 최대한 활용하여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그 지성의 끝에서 만난 신비 앞에서 비로소 참된 침묵과 찬양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다섯 가지 길은 신에게 오르는 지성적 관조의 사다리입니다. 이 사다리는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지만 그 끝은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우리에게 눈을 들어 세상을 보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운동 속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을 보고 인과관계의 사슬 속에서 시작 없는 시작을 보며 우연한 존재들의 덧없음 속에서 필연적인 생명을 보라고 권합니다. 이 지적인 순례는 머리로 시작하지만 결국 가슴을 울리는 웅장한 찬가로 귀결됩니다. 피조물의 질서 정연함 속에서 창조주의 지혜를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가 거저 주어진 선물임을 깨닫는 순간 인간의 지성은 가장 높은 차원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적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가 차가운 논리로 쌓아 올린 뜨거운 신비주의의 정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