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포기와 존재의 충만
13세기 프란치스코 운동이 유럽 슬롯에 던진 가장 큰 충격은 가난에 대한 새로운 정의였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그의 초기 동료들에게 가난은 단순히 재화가 부족한 경제적 결핍 상태나 극복해야 할 슬롯적 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을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진실을 드러내는 형이상학적 원리로 격상시켰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귀부인 가난 (Domina Paupertas)’이라고 불렀던 이 개념은 소유의 반대말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함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 대상에 의해 구속됨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신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자유를 제한하는 족쇄가 됩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 영성에서 가난은 소유물을 버리는 행위를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마저 포기하는 존재론적 결단을 의미합니다.
프란치스코적 가난의 출발점은 인간과 피조물의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통찰에 있습니다. 그는 당시 중세 교회가 견지해 온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교리를 가난의 실천을 위한 신학적 대전제로 삼았습니다. 이 명제는 창조주가 선재하는 물질이나 재료를 사용하여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무 (無)의 상태에서 오직 신의 전능한 의지만으로 만물을 존재하게 했다는 전통적인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자존성 (Aseitas)을 결여하고 있으며, 오직 창조주의 지속적인 부여 (附與) 행위에 의존해서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생명과 재능 그리고 의지까지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잠시 빌려 온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유 (Proprium)의 행위는 근본적인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이며 신의 것을 도둑질하는 영적인 범죄가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소유의 의지를 자기 뜻 (Voluntas Propria)이라고 부르며 이를 버리고 모든 것을 원주인인 신에게 돌려드리는 것을 참된 가난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가난의 형이상학은 ‘소유 없이 사용함 (Usus sine iure)’이라는 독특한 생활 양식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은 의복이나 바카라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거주하는 수도원 건물에 대해서도 일체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사용할 권리만을 가졌을 뿐입니다. 이는 로마법이 정의하는 소유권 즉 물건을 사용하고 처분하며 그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 (Dominium)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적인 권리 없이 타인의 호의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의 지배 질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히 금욕적인 고행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나그네이자 순례자임을 증언하는 예언적 행위였습니다.
가난은 비움 (Kenosis, 케노시스)의 신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비움은 그리스어 '케노스' (kénōsis, 비우다/비어 있음)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 7절에서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고백했듯이, 신성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신적 영광을 스스로 내려놓고 인간의 형상을 취한 '자기 비움'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성육신 (Incarnatio)에 담긴 신의 비천함을 본받아, 소유와 권력의지를 완전히 덜어내는 실존적 비움을 실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가난을 넘어, 자아를 고집하는 내면의 충만함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신성한 은총이 머물게 하는 존재론적 태도 전환을 뜻합니다. 결국 비움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 타자와의 온전한 일치를 허용하는 사랑의 가장 역동적인 표현으로 평가받습니다. 신의 성육신 사건은 신성이라는 가장 고귀한 부유함을 버리고 인간성이라는 가난함을 취한 최고의 겸손이었습니다. 따라서 가난은 신의 본성을 닮아가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부유함은 자신을 채워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의 속성을 지니지만 가난은 자신을 비워 아래로 내려가는 겸손의 속성을 지닙니다. 텅 빈 그릇만이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듯이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들어 내면을 비운 영혼만이 신의 은총을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이 역설적인 원리에 따르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사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특정 대상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우주 전체를 품고 그 주인이신 신과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소유 없는 삶 (Sine Proprio)은 인간관계와 슬롯 구조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을 요구합니다. 소유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를 지키기 위해 방어와 폭력을 불러옵니다.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명확해질수록 인간 사이의 형제애는 약화되고 경쟁과 적대감이 자라납니다. 반면 가난은 이러한 경계를 허물고 타자와의 연대를 가능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누구와도 다툴 필요가 없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십자군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비무장으로 이슬람 술탄을 찾아갈 수 있었던 용기는 바로 이 철저한 가난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방어할 권리조차 포기함으로써 적대감을 무력화시키고 평화의 공간을 창출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의지의 가난 (Paupertas Voluntaria)’이라는 개념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가난을 환경에 의해 강요된 결핍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지향을 방해하는 모든 집착으로부터 의지를 해방시키는 주체적인 선택으로 재정의한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물질적인 빈곤 그 자체는 덕이 아니며 오직 자발적인 의지로 선택한 가난만이 영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소유물의 유무가 아니라 내적인 집착의 유무입니다. 마음이 탐욕으로 가득 찬 가난한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난한 자가 아니며 반대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이 그 재물에 매이지 않고 언제든 신을 위해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는 마음의 가난만 강조하다가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부유함을 누리는 위선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외적인 엄격함'과 '내적인 이탈'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가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외적인 엄격함이란 실제 생활에서 물질적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고 검소하게 사는 구체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내적인 이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재물에 대한 애착과 소유욕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영적 자유를 뜻합니다. 몸은 가난하게 살지만 마음은 부유함을 갈망하는 것도, 반대로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며 사치스럽게 사는 것도 모두 거짓입니다. 이 두 가지가 온전히 결합될 때 비로소 가난은 덕이 됩니다.
가난의 형이상학은 지식의 문제로도 확장됩니다. 프란치스코는 학문적인 지식조차도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지식은 소유한 자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타인을 판단하거나 지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형제들이 바카라을 소유하거나 학위를 취득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지적 오만은 신의 지혜가 들어올 자리를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가난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신의 지적 성취를 자랑하지 않는 지적인 겸손을 포함합니다. 이는 앎을 포기하는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지식을 자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오직 봉사와 사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태도입니다.
가난은 종말론적인 희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현세의 재화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는 인간의 궁극적인 고향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나그네는 여행 중에 짐을 가볍게 합니다. 무거운 짐은 여행을 지체시키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미리 앞당겨 사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소유와 지배가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신 안에서 하나가 되는 친교만이 남습니다. 가난한 자는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유인입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안전보장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신의 섭리에 자신의 생존을 맡김으로써 신앙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결국 가난의 형이상학은 존재의 충만함으로 귀결됩니다. 비움은 채움을 위한 준비이며 포기는 더 큰 획득을 위한 과정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죽음의 순간에 알몸으로 땅 위에 눕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긍정하는 행위이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순수한 생명 그 자체로 창조주 품에 안기겠다는 최후의 헌신이었습니다. 그에게 가난은 결핍의 고통이 아니라 신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지복의 상태였습니다. 그는 가난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소유욕의 끈을 끊어버리고 오직 신과 단독으로 대면하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소유의 층위를 벗겨낸 자리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벌거벗은 존재야말로 신의 형상이 가장 투명하게 비치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손에 쥔 것을 놓을 때 비로소 빈손으로 신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이 단순하고도 엄중한 진리는 소유의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존재의 참된 의미를 묻는 거대한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냉철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실천한 가난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자유 의지로 선택한 ‘의지의 가난’이었습니다. 오늘날 일부 사이비 종교 집단이 가난의 미덕을 악용하여 신도들에게 전 재산의 헌납을 강요하거나 경제적 곤궁을 신앙심의 척도로 호도하는 것은,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영적 폭력입니다. 진정한 가난은 영혼을 물질로부터 해방시켜 신에게 나아가게 하지만, 타인에 의해 강요된 가난은 개인의 주체성을 파괴하고 종교 권력에 예속시킬 뿐입니다. 가난이 자유를 위한 날개인지 아니면 착취를 위한 족쇄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우리가 손에 쥔 것을 놓을 때 비로소 빈손으로 신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이 단순하고도 엄중한 진리는 소유의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존재의 참된 의미를 묻는 거대한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