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존재의 의식 (意識)은 대부분의 시간을 ‘깨어있음’이라는 하나의 상태에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느끼고, 활동하는 이 상태만을 ‘나의 삶’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 깨어있는 의식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불안정합니다. 그것은 매일 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잠’이라는 어둠 속으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의 끝에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거대하고 영원한 어둠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잠과 죽음을 ‘의식의 끝’, 즉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공백과 소멸의 상태라고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금강승 (金剛乘, Vajrayāna, 바즈라야나)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은 이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엎습니다. 이 길은 우리가 ‘의식의 상실’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가장 깊고 순수한 본질이 그 어떤 가림막도 없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가장 위대하고도 결정적인 기회의 순간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본질의 빛을 정광명 (淨光明, Clear Light, 'od gsal, 외셀) 또는 ‘빛나는 마음 (Luminous Mind, Prabhāsvara, 프라바스와라)’이라고 부릅니다.
나로파 (Nāropa)의 여섯 가지 요가 중 네 번째인 이 정광명 요가, 즉 ‘외셀’의 수행은, 이 무지의 어둠처럼 보이는 잠과 죽음의 순간 속으로 깨어있는 횃불을 들고 들어가는, 가장 대담하고도 궁극적인 수행입니다. 이 수행의 목적은 툼모 (gtum mo)의 불길로 억지로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매일 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저절로 드러나는 그 ‘근원적인 빛’을 마침내 ‘알아보는 (Recognition)’ 법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밤 잠에 듭니다. 이 일상적인 행위는 사실 우리가 일생에 단 한 번 겪게 될 죽음의 과정을 매일 밤 예행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잠의 세계로 들어갈 때, 우리의 거친 의식은 죽음의 과정과 똑같은 순서로 해체됩니다. 감각의 문이 닫히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원소에 해당하는 에너지들이 차례로 그 힘을 잃고 더 미묘한 차원으로 녹아듭니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의 분별하는 마음, 즉 ‘나는 생각한다’고 여기던 이원적인 의식 (conceptual mind)도 그 지지대를 잃고 활동을 멈춥니다.
이 모든 거친 의식의 작용이 멈춘 바로 그 순간, 꿈이 시작되기 직전의 아주 짧고 깊은 틈새에, 우리는 ‘깊은 잠 (Deep Sleep, suṣupti, 수슙티)’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순간은 완전한 ‘무의식’, 즉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공백 (oblivion)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상태를 ‘까맣게 잠들었다’고 표현하며, 다음 날 아침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윤회에 묶어두는 가장 깊은 뿌리, 즉 근본 무지 (Avidyā, 아비드야)입니다.
금강승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공백’이라고 착각하는 이 깊은 잠의 상태는 결코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생각과 감각의 구름이 걷힌 자리에 드러난, 우리 마음의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본바탕, 즉 ‘잠의 정광명 (Clear Light of Sleep)’입니다. 이 빛은 텅 비어 (空性, 슈냐따) 있습니다. 그 안에는 ‘나’와 ‘세상’이라는 구분이 없고, 어떤 형태나 색깔, 개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무 (無)’가 아닙니다. 그것은 ‘빛나고 (光明, 프라바스와라)’ 있습니다. 즉,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잠재력, 순수한 ‘앎 (Awareness, rigpa, 릭파)’ 그 자체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지극히 미묘하고 실체가 없는 빛을 알아차릴 만큼 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거친 감각과 생각들에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 순수한 앎의 빛을 ‘아무것도 없음’으로 착각하고 그 속에서 의식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밤 무지 속에서 잠드는 이유입니다.
정광명 요가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이 무지의 습관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수행은 너무나도 미묘하여, 깨어있는 상태에서 곧바로 깊은 잠 속의 빛을 알아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반드시 그 다리 역할을 하는 ‘꿈의 요가 (Dream Yoga, Milam, 밀람)’를 먼저 닦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먼저 꿈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자각하는 훈련 (자각몽)을 합니다. 꿈속에서 의식을 유지하는 힘이 길러지면, 그는 더 높은 단계의 수행에 도전합니다. 즉, 꿈의 마지막 순간, 꿈의 내용이 사라지고 깊은 잠의 ‘정광명’ 속으로 의식이 녹아드는 바로 그 경계선을 깨어있는 채로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의 정광명 요가’입니다. 수행자는 더 이상 잠 속에서 ‘의식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잠이 드는 모든 과정을 명료하게 지켜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생각과 꿈의 형상이 사라진 근원적인 빛, 즉 텅 비어 있으면서도 빛나는 마음의 본성 (잠의 정광명)을 ‘알아봅니다’. 그는 그 빛을 두려워하거나 그 속에서 잠드는 대신, 그 빛과 하나가 되어, 마치 맑은 물이 맑은 물에 섞이듯, 그 순수한 의식의 바탕 속에서 ‘깨어있는 채로 휴식’합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무의식의 심연에서 허우적대며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광명의 빛 속에서 의식적으로 다시 꿈의 몸과 깨어있는 몸의 현상을 일으키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 수행자는 매일 밤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을 만납니다. 그는 더 이상 잠을 무의식적인 도피나 휴식으로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는 잠을 가장 심오한 명상으로, 깨달음의 근원과 합일하는 거룩한 수행으로 변형시킵니다.
이처럼 매일 밤 ‘잠의 정광명’을 알아보고 그와 합일하는 훈련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일생의 단 한 번뿐인 가장 결정적인 순간, 즉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금강승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겪는 내면의 과정은 우리가 매일 밤 잠에 들 때 겪는 과정과 정확히 동일합니다. 다만 그 강도가 훨씬 더 강력하고, 한 번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숨이 멎을 때 (外呼吸의 정지), 우리 존재를 구성하던 거친 원소들, 즉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에너지가 차례대로 내부의 미묘한 의식 속으로 녹아듭니다 (dissolution). 이 과정 (Chikhai Bardo, 치카이 바르도)에서 우리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완전히 잃게 됩니다.
그 다음, 우리의 내면 의식 자체도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분별하는 생각과 거친 마음의 작용이 점차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이원성의 세계에 묶어두었던 모든 거친 에너지, 즉 이다 (Īḍā)와 핑갈라 (Piṅgalā) 나디를 흐르던 모든 ‘업의 바람 (프라나)’이 그 활동을 멈추고 중심 통로인 수슘나 (Suṣumnā) 안으로 강제로 흡수됩니다.
이것이 바로 완벽차제 수행 (툼모)을 통해 우리가 살아생전 의도적으로 재현하려 했던 바로 그 순간입니다. 모든 이원적인 프라나의 활동이 중앙 통로 안에서 완전히 ‘녹아들 때 (dissolve)’, 그 바람을 타고 움직이던 모든 거친 마음과 생각들도 함께 소멸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텅 빈 바탕 위에서, 우리 마음의 가장 깊고 순수한 본질, 즉 ‘죽음의 근원 정광명 (Ground Clear Light of Death)’이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눈부시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해탈을 위한 첫 번째이자 가장 위대한 기회입니다. 이 정광명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본래 모습인 불성 (佛性)이며, 텅 비어 있으면서도 (空性) 모든 것을 아는 (光明) 순수한 의식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평생 동안 자신을 ‘육체’와 ‘자아 (Ego)’라고만 믿고 살아온 훈련받지 못한 의식에게, 이 순수하고 실체 없는 빛은 너무나 생경하고 압도적입니다. 그들은 이 빛의 광휘 앞에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거나, 자신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이 해방의 빛을 외면하고, 다시 ‘나’라는 분리된 의식을 찾아 과거의 습관적인 어둠 속으로 도피합니다. 그들은 결국 이 찰나의 기회를 놓치고, 의식을 잃은 채 다음 단계의 혼란스러운 바르도 (Bardo)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나로파의 6법, 특히 정광명 요가를 닦은 수행자는 다릅니다. 그는 이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평생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는 매일 밤 ‘잠의 정광명’ 속에서 이 빛과 만나는 연습을 해왔습니다. 그에게 죽음의 순간에 드러나는 이 ‘근원의 정광명’은 낯설고 두려운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 밤 만나던, 가장 친숙하고 그리운 ‘어머니의 빛 (Mother Clear Light)’입니다.
죽음의 순간, 이 ‘어머니 정광명’이 드러날 때, 수행자는 살아생전 수행을 통해 닦아온 자신의 맑은 알아차림, 즉 ‘아들 정광명 (Child Clear Light)’과 함께 그것을 마주합니다.
그는 두려워하거나 기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즉시 그 빛을 ‘알아봅니다 (Recognition)’.
“아, 이것이로구나! 이것이 내가 평생을 닦아온 바로 그 마음의 본성이로구나!”
이 위대한 ‘알아차림’의 순간, ‘아들 정광명’ (수행자의 의식)은 ‘어머니 정광명’ (우주의 근원 의식)의 품 안으로 뛰어듭니다. 마치 강물이 바다로 돌아가 하나가 되듯이, 이 둘은 완전히 하나로 합일 (合一)됩니다. 이 순간, 모든 분리는 사라집니다. 카르마의 사슬은 끊어지고, 윤회의 바퀴는 멈춥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순간에 성취하는 완전한 깨달음 (成佛, 성불)이며, 더 이상 바르도의 혼란을 겪을 필요가 없는 궁극의 해방입니다.
이처럼 정광명 요가는 우리에게 잠과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과 소멸의 영역이 아님을 가르칩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진실, 즉 텅 비어 있으면서도 빛나는 우리의 본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자비로운 기회의 문입니다. 나로파의 6법은 우리가 그 문을 두려움 없이 열고 들어가, 마침내 빛 속에서 영원한 자유를 찾도록 이끄는 가장 심오한 지혜의 등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