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4. 공성 (空性)을 체험하는 가장 빠른 길

by이호창

4-14.4. 공성 (空性)을 체험하는 가장 빠른 길




대승불교 (大乘佛敎, Mahāyāna, 마하야나)의 모든 길은 궁극적으로 공성 (空性, śūnyatā, 슈냐따)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공성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고정된 실체가 없이 오직 상호 의존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함을 꿰뚫어 보는, 윤회 (Saṃsāra, 삼사라)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궁극의 지혜입니다. 전통적인 현교 (顯敎, Sūtrayāna, 수뜨라야나)의 길에서 수행자는 경전 학습과 논리적 사유를 통해 이 공성을 먼저 지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삼아승기겁 (三阿僧祇劫)’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공덕을 쌓고 마음을 닦으며, 이 지적인 이해가 점진적으로 직접적인 체험으로 변모하기를 기다립니다. 이 길에서 공성의 완전한 체험은 이 지난한 과정의 가장 마지막에 찾아오는, 아득히 먼 결과입니다.

하지만 금강승 (金剛乘, Vajrayāna, 바즈라야나)은 이 기나긴 시간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금강승이 공성을 체험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지적인 사유나 점진적인 공덕 쌓기에만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강승은 우리 존재의 가장 미묘한 차원, 즉 우리 마음의 본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에너지 시스템을 다루는 강력하고도 정교한 기술 (Technology)을 사용합니다. 이 길은 공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성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우리 자신을 ‘만들어’ 버립니다.

이 속도의 비밀은 우리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한 탄트라의 깊은 통찰에 있습니다. 탄트라에 따르면, 우리의 산란하고 이원적인 마음, 즉 ‘나’와 ‘세상’을 분리해서 보고 온갖 번뇌 (kleśa, 끌레샤)에 휩쓸리는 분별심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몸 안의 미묘한 에너지 통로인 나디 (Nāḍī)를 흐르는 ‘업의 바람 (業風, karma-vāyu, 카르마-바유)’, 즉 프라나 (Prāṇa)의 활동과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바람을 타고 움직입니다. 평범한 상태에서 이 업의 바람은 척추 좌우의 측면 통로인 이다 (Īḍā)와 핑갈라 (Piṅgalā) 나디를 통해서만 불균형하게 흐릅니다. 이 좌우의 거친 바람이 부는 한, 우리의 마음 역시 이원성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척추의 가장 중심이 되는 통로, 즉 비이원성의 길인 수슘나 나디 (Suṣumnā Nāḍī) 또는 아바두티 (Avadhūti)는 굳게 닫혀 있습니다. 현교의 수행자는 오랜 명상을 통해 이 좌우의 바람이 자연스럽게 잔잔해져서, 오직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모든 바람이 수슘나로 모여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모든 거친 마음이 멈춘 자리에서 마음의 가장 미묘한 본성인 ‘정광명 (淨光明, Clear Light, Prabhāsvara, 프라바스와라)’이 드러납니다. 이 정광명이야말로 공성의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현교 수행자는 이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평생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금강승 수행자는 죽음의 순간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는 바로 지금, 이 살아있는 몸을 가지고 ‘죽음의 과정’을 의도적으로 재현하는 강력한 요가 기술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승의 핵심 수행 단계인 ‘완벽차제 (圓滿次第, Sampannakrama, 삼판나크라마)’입니다. 이 수행의 유일한 목표는 단 하나, 즉 이다와 핑갈라를 흐르는 모든 ‘업의 바람 (프라나)’을 강제로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바람을 굳게 닫힌 중심 통로 (수슘나/아바두티) 안으로 불어넣어 그 안에서 ‘녹아들게 (dissolve)’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내면의 불 (Inner Fire)’ 수행 (툼모, Tummo 또는 찬달리, Caṇḍalī)과 같은 강력한 기법이 동원됩니다. 수행자는 강력한 호흡 보유 (Kumbhaka, 쿰바카), 복부와 회음부 등을 조이는 에너지 잠금( Bandha, 반다), 그리고 정교한 시각화를 결합합니다. 이러한 수행은 배꼽 차크라 (Maṇipūra, 마니푸라) 부근에서 강력한 내면의 영적인 열기를 발생시킵니다. 이 뜨거운 불길은 좌우 나디에 흩어져 흐르던 모든 프라나들을 마치 불이 연기를 빨아들이듯 강력하게 중앙 통로인 수슘나로 끌어들입니다.

모든 프라나 에너지가 이다와 핑갈라라는 이원성의 통로를 떠나, 수슘나라는 비이원성의 중심 통로로 모여들어 안정되고, 마침내 그 안에서 완전히 ‘녹아들 때 (laya, 라야)’, 우리 존재에는 경이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프라나 (바람)라는 연료에 의지해 타오르던 우리의 거친, 이원적인 마음 (오감의 의식과 분별하는 생각)은 그 지지대를 잃고 모든 활동을 멈추게 됩니다. 마치 텔레비전의 플러그를 뽑으면 화면이 즉시 꺼지듯이, 감각의 문이 닫히고 개념적인 생각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이 과정은 수행자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내면의 해체 과정, 즉 지 (地) · 수 (水) · 화 (火) · 풍 (風)의 원소가 차례로 녹아드는 과정을 그대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거친 의식의 작용이 멈춘 그 자리에, 우리 마음의 가장 깊고 미묘하며 근원적인 본성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정광명 (淨光明)’ 또는 ‘빛나는 마음’입니다. 이 정광명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진정한 본성이며, 금강승이 추구하는 공성 (空性)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비 (非)개념적인 체험입니다. 이 빛은 ‘텅 비어 (空)’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나’와 ‘너’를 나누는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이 없으며, 개념적인 분별이나 고정된 실체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 (虛無)가 아닙니다. 그것은 ‘빛나고 (明)’ 있습니다. 즉, 텅 비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아는 능력, 순수한 ‘앎’ 그 자체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금강승은 이처럼 프라나를 중앙 통로로 이끄는 강력한 요가 기술을 통해, 수행자가 이 ‘공 (空)과 명 (明)이 둘이 아닌 (空明無二, 공명무이)’ 마음의 본성을 지적인 이해가 아닌 직접적인 체험으로 만나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현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도달하려는 목표를 단숨에 꿰뚫는 ‘벼락’과 같은 길입니다.

더 나아가, 금강승은 이 공성의 체험이 결코 메마르거나 차가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 공성의 체험은 형언할 수 없는 강렬한 ‘지복 (至福, Bliss)’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지복을 ‘대락 (大樂, Mahāsukha, 마하수카)’이라고 부릅니다. 이 지복은 감각적인 쾌락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프라나가 중앙 통로인 수슘나로 들어가 각 차크라에 잠재되어 있던 미묘한 생명 정수 (精髓), 즉 빈두 (Bindu) 또는 팅글레 (Tigle)를 녹일 때 발생하는 순수한 내면의 환희입니다. 특히 정수리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있는 흰색 빈두 (보리심)가 녹아내릴 때, 수행자는 외부의 어떤 대상에도 의존하지 않는, 지극히 강력하고도 순수한 내면의 지복을 경험합니다.

금강승은 바로 이 ‘지복’과 ‘공성’의 합일 (樂空無二, 낙공무이)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강력한 지복 속에서 마음은 모든 산란함을 멈추고 지극히 안정되며, 이 지복으로 가득 찬, 지극히 미묘하고 강력해진 마음 (정광명)으로 자신의 본성인 공성을 꿰뚫어 봅니다. 지복은 공성을 깨닫는 힘을 실어주는 강력한 연료가 됩니다. 그리고 공성의 지혜는 그 지복이 단순한 쾌락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이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한 쌍의 날개입니다.

금강승이 공성을 체험하는 가장 빠른 길인 이유는 그것이 공성에 대해 ‘생각’하는 길(현교)이 아니라, 공성을 직접 체험할 수밖에 없는 생리적·에너지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수행자의 존재 전체, 즉 거친 육체에서부터 가장 미묘한 프라나와 마음의 본성까지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지금 여기’에서 공성의 지혜와 지복의 체험을 정면으로 구현해내는,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 벼락처럼 빠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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