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5. 탄트라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껴안습니다

by이호창

4-13.5. 탄트라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세상을 껴안습니다




깨달음을 향한 길을 찾는 많은 이들은 오랫동안 두 갈래의 길 앞에서 망설여 왔습니다. 한 길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을 고통의 근원이자 덧없는 환영 (Māyā, 마야)으로 보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세속적인 욕망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멀리하는 ‘떠남의 길’입니다. 이는 금욕 (Tapas, 타파스)과 포기 (Tyāga, 트야가), 그리고 초연함 (Vairāgya, 바이라갸)을 강조하는 고행자 (Sannyāsin, 산냐신)의 길입니다. 하지만 힌두 탄트라 (Tantra)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지극히 대담하고도 삶을 긍정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탄트라는 세상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탄트라는 이 세상 전체를,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 감각과 욕망까지도 남김없이 껴안으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환영이 아닌 신성의 표현입니다


많은 영적 전통들이 이 현상 세계를 ‘속박 (Bandha, 반다)’의 원인으로 보고 그 너머의 절대적인 실재만을 추구했다면, 탄트라는 그 관점을 근본적으로 뒤집습니다. 힌두 탄트라, 특히 카슈미르 샤이비즘 (Kashmir Shaivism)과 같은 비이원론적 (Non-dual) 전통에서 이 세상은 결코 벗어나야 할 환영이나 거짓이 아닙니다. 이 우주 만물은 바로 궁극의 실재인 시바-샤크티 (Śiva-Śakti)가 스스로를 드러낸 생생한 표현 (Abhāsa, 아바사)입니다.

이 세상은 순수한 의식인 시바 (Śiva)라는 캔버스 위에, 그의 역동적인 힘이자 자유 의지인 샤크티 (Śakti)가 그려내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우리가 보는 산과 강, 우리가 듣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 이 모든 것은 신성한 여신 샤크티가 추는 거대한 우주적 춤 (Līlā, 릴라)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탄트라 수행자에게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곧 신성한 여신 그 자체를, 즉 신 (神)의 창조적인 유희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탄트라가 샥티를 숭배한다는 것은 바로 이 삶과 세상에 대한 깊은 긍정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보고 도피하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이 세상 속의 모든 현상, 심지어 우리가 ‘추하다’거나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것들 속에서도 신성한 샤크티의 숨결을 느끼고 그것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탄트라는 우리에게 삶을 부정하는 대신, 삶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축복하고 그 안에서 깨달음을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버리는 길이 아닌, 변형시키는 길


세상을 껴안는다는 것은 단순히 현실에 안주하거나 쾌락에 탐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수행의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줍니다. 세상을 부정하는 길 (Nivṛtti Mārga, 니브릿티 마르가)이 감각을 닫고 욕망을 ‘소멸’시키려 노력한다면, 탄트라로 대표되는 세상을 긍정하는 길 (Pravṛtti Mārga, 프라브릿티 마르가)은 감각을 열고 그 욕망의 에너지를 ‘변형 (Transformation)’시키려 합니다.

탄트라는 우리를 속박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바로 우리의 욕망, 분노, 두려움과 같은 강렬한 에너지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탄트라는 이 에너지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강렬한 에너지가 본래는 쿤달리니 (Kuṇḍalinī)라는 거대한 샤크티의 힘이 왜곡되거나 잘못 사용된 모습임을 꿰뚫어 봅니다. 예를 들어, 강렬한 성적 욕망은 본래 우주적인 합일을 향한 그리움이며, 불타는 분노는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강력한 힘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탄트라 수행자, 즉 영웅 (Vīra, 비라)은 이 에너지들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그는 ‘독 (毒)으로 독을 다스린다’는 연금술적인 지혜를 따릅니다. 그는 깨어있는 알아차림 (Awareness)과 강력한 의지력으로 그 에너지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에 휩쓸려 파괴되는 대신, 그 힘의 방향을 돌려 더 높은 의식의 각성을 위한 연료로 사용합니다.

빤차마카라 (Pañcamakara)와 같은 파격적인 의례는 바로 이 ‘변형의 기술’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예입니다. 금기시된 것들을 의식적으로 마주함으로써, 수행자는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이원성의 분별심 자체를 깨뜨리고, 모든 에너지 속에 내재된 신성한 힘을 자각하여 그것을 해탈의 도구로 삼습니다. 이처럼 탄트라는 버리는 길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깨달음의 재료로 삼는 적극적인 변형의 길입니다.


육체는 감옥이 아닌 신성한 사원입니다


세상을 긍정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의 몸’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금욕주의 전통들이 육체를 영혼이 갇힌 감옥, 죄의 근원, 혹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몸을 학대하거나 그 욕구를 철저히 무시하는 고행 (Tapas, 타파스)이 강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탄트라는 이 육체야말로 우주 전체의 비밀을 담고 있는 ‘소우주 (Microcosm)’이며, 신성이 거주하는 가장 신성한 사원 (Temple)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신 (시바)과 여신 (샤크티)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몸 안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순수한 의식인 시바는 우리의 정수리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그리고 우주적 에너지인 샤크티는 척추의 기저부 (물라다라 차크라)에 쿤달리니라는 잠재된 불꽃으로 깃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탄트라에게 육체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도구 (Yantra, 얀트라)입니다. 하타 요가 (Hatha Yoga)의 아사나 (Āsana), 프라나야마 (Prāṇāyama), 무드라 (Mudrā), 반다 (Bandha)와 같은 모든 신체적인 수행은 이 몸을 학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신성한 사원을 깨끗이 정화하고, 막힌 에너지 통로 (Nāḍī, 나디)를 열며, 잠들어 있는 쿤달리니라는 내면의 신성을 깨우기 위한 정교한 준비 과정입니다. 탄트라는 몸을 통해 몸을 넘어서는 길이며, 육체의 감각을 통해 초월적인 지복 (Ānanda, 아난다)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몸을 긍정하고 사랑하며 그 안의 신비에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을 껴안는 탄트라 수행의 출발점입니다.


즐거움 (Bhoga)과 해탈 (Moksha)은 둘이 아닙니다


세상을 껴안는 탄트라의 길은 그 철학적 정점에서 가장 혁명적인 선언에 이릅니다. 그것은 바로 세속적인 삶의 경험과 즐거움 (Bhoga, 보가)이 영적인 해탈 (Mokṣa, 목샤)과 반드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입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양자택일의 문제였습니다. 즐거움을 택하면 속박에 머무르고, 해탈을 원하면 즐거움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이원론에 확고히 서 있는 탄트라는 이 둘의 통합을 선언합니다. 이 세상 자체가 신성한 샤크티의 아름다운 유희 (Līlā)라면, 그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이나 아름다움, 기쁨과 같은 경험 역시 본질적으로는 신성의 달콤함이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즐거움 그 자체가 아니라, ‘나’라는 분리된 자아 (Ego)가 그 즐거움을 소유하고 영원히 붙잡으려는 집착 (Rāga, 라가)에 있습니다.

탄트라의 영웅 (Vīra)은 즐거움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는 삶이 주는 모든 경험을 온전히 맛보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는 깨어있는 알아차림 속에서 모든 감각적인 경험을 신성한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 (Offering)로 여깁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그는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 아름다움 속에서 샤크티의 창조성을 경배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그는 탐닉에 빠지는 대신, 그 맛을 통해 내게 생명을 주는 우주의 풍요로움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 그는 감정적인 의존이나 소유욕을 넘어, 서로의 내면에 깃든 신성을 마주 보고 교감합니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 세속적인 즐거움 (Bhoga)은 더 이상 우리를 묶는 족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 순간 신성의 현존을 자각하고 ‘합일의 경지’를 체험하는 신성한 요가 (Yoga) 수행이 됩니다. 삶의 모든 경험이 곧 깨달음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가 에바 요가 (Bhoga eva Yoga)’, 즉 ‘즐거움 자체가 곧 요가’라는 탄트라의 대담한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탄트라는 이처럼 우리에게 세상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탄트라는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 우리의 몸, 우리의 감각, 우리의 일상, 심지어 우리의 고통과 욕망까지도 남김없이 껴안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신성한 의식의 빛으로 비추고 변형시킴으로써, 이 세상 속에서 완전한 자유와 지복을 실현하라고 초대합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닌 참여의 길이며, 부정이 아닌 긍정의 길,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삶 전체를 신성한 축제로 승화시키는 껴안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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