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5. 왜 여성적 힘, 샤크티를 숭배하는가

by이호창

3-10.5. 왜 탄트라는 여성적 힘, 샤크티를 숭배하는가




수많은 영적 전통들이 현상 세계를 덧없거나 고통스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그 너머에 있는 불변의 절대자, 즉 초월적인 남성적 원리 (신, 아버지, 순수 의식)를 향한 귀의를 강조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과 우리의 몸, 끊임없이 요동치는 감정과 욕망은 종종 극복하거나 벗어나야 할 장애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탄트라 (Tantra)는 이 지점에서 인류의 영성사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도 대담한 전환을 이룹니다. 탄트라의 세계관 속에서, 이 모든 현상 세계와 그것을 창조하고 움직이게 하는 역동적인 힘은 결코 환영이나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 (神性) 그 자체의 살아있는 표현이며, 숭배와 경외의 대상입니다. 탄트라는 이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우주의 힘을 여성적 원리, 즉 샤크티(Śakti, 샤크티)라고 부르며, 이 위대한 여신 (Goddess, Devī)을 숭배하는 것을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핵심적인 길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왜 탄트라는 다른 많은 전통들과 달리, 혹은 힌두교의 다른 흐름들과도 구별되게, 이 ‘여성적 힘’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숭배하는 것일까요? 이는 탄트라가 가진 독특한 철학과 실천 방식에 그 답이 있습니다. 탄트라가 샤크티를 숭배하는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남성적 원리인 시바(Śiva, 시바)의 배우자이거나 부수적인 힘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는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 그 자체이며,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이고, 나아가 우리를 궁극적인 ‘합일의 경지’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자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탄트라의 가장 깊은 통찰 중 하나는, 순수한 의식 (시바)과 역동적인 에너지 (샥티)가 본래 하나라는 것입니다. 시바는 움직이지 않는 바탕, 즉 프라카샤 (Prakāśa)라는 ‘빛’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이 빛이 스스로 “내가 존재한다”라고 자각하는 힘, 즉 비마르샤 (Vimarśa)가 없다면, 그 빛은 아무런 의미도, 현상도 없는 공허함에 머무를 것입니다. 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힘’, 이 ‘창조적인 떨림’이 바로 샥티입니다. 그리고 이 샥티의 자기 인식 활동이 곧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우주 만물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감 (五感)으로 경험하는 이 세상, 즉 아름다운 자연, 밤하늘의 별,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 심지어 우리의 육체와 마음까지도 모두 샥티가 스스로를 드러낸 모습입니다. 시바가 초월적이고 보이지 않는 실재라면, 샥티는 내재적이고 눈앞에 현현 (顯現)하는 실재입니다. 많은 영적 전통들이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 (샥티의 춤)를 ‘환영 (Māyā, 마야)’으로 보고,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실재 (시바)만을 추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탄트라는 정반대의 관점을 취합니다. 물론 샥티가 이 현상 세계를 펼쳐내는 힘 (마야)이기도 하지만, 탄트라에게 그 현상 세계 자체가 거짓이거나 버려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성한 여신, 샤크티가 입고 있는 아름다운 옷이며, 그녀가 추는 경이로운 춤입니다.

탄트라가 샥티를 숭배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 ‘세상 긍정 (World-Affirmation)’의 태도에 있습니다. 샥티를 숭배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현실과 우리의 몸,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경험을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껴안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보고 도피하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이 세상 속의 모든 현상, 나무 한 그루, 스치는 바람, 내 안의 감정 하나하나에서 신성한 샥티의 숨결을 느끼고 그것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샥티 숭배는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신성한 것으로 축복하고 그 안에서 깨달음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태도의 표현입니다.

탄트라의 통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샥티는 이처럼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하고 우리에게 생생한 경험을 선사하는 자비로운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그녀는 우리를 분리의 감옥에 가두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펼쳐내는 마야 (Māyā)의 힘, 즉 이름과 형태의 장막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매혹적이어서, 우리는 그 현상들에 쉽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우리는 자신이 본래 순수한 의식 (시바)과 하나임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이 유한한 몸과 마음 (에고)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 착각 (Avidyā, 아비드야) 속에서 우리는 ‘나’와 ‘너’를 나누고, ‘좋음’과 ‘싫음’을 분별하며, 끊임없는 집착과 혐오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이처럼 샥티는 우리를 속박하는 (Bandha, 반다) 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탄트라의 가장 역설적이고도 위대한 가르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푸는 열쇠는 쇠사슬 그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속박하는 바로 그 에너지 (샥티)가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 (샥티)이라는 진실입니다. 샥티는 무지 (Avidyā-Śakti, 아비드야-샥티)의 모습으로 우리를 묶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혜( Vidyā-Śakti, 비드야-샥티)의 모습으로 우리를 풀어주기도 합니다. 그녀는 독 (毒)이자 동시에 약 (藥)입니다.

탄트라가 샥티를 숭배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무지와 속박이 궁극적으로 샥티 여신의 유희 (Līlā, 릴라)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번뇌나 욕망, 혹은 세상의 유혹을 적으로 간주하고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그 모든 힘의 근원인 위대한 여신, 샥티에게로 돌아섭니다.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아이가 어머니를 찾듯, 샥티에게 자비를 구하고 그녀의 은총 (Śaktipāta, 샤크티파타)을 갈망합니다.

“오, 위대한 어머니시여, 당신의 힘 (마야)이 저를 이 환영 속에 묶어 두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자비로운 힘 (은총)으로 저를 이 속박에서 풀어주소서.”

샥티 숭배는 이처럼 자신을 묶고 있는 힘의 근원에게로 나아가, 그 힘 자체를 통해 해방을 구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전략입니다. 수행자는 샥티의 발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 (Prapatti, 프라파티 또는 Īśvara praṇidhāna, 이슈와라 프라니다나)함으로써, 그녀가 무지의 베일을 걷고 진실을 드러내 주기를 기도합니다.

탄트라가 샥티를 숭배하는 세 번째이자 가장 실천적인 이유는, 이 우주적인 여성적 힘이 단지 저 바깥 우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몸 안에 가장 농축된 형태로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쿤달리니 샤크티 (Kuṇḍalinī Śakti)입니다.

쿤달리니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 위대한 샥티의 힘이 우리 각자의 몸 안, 척추의 가장 밑부분인 물라다라 차크라 (Mūlādhāra cakra)에 세 바퀴 반 또아리를 튼 뱀의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궁극의 잠재 에너지입니다. 그녀는 명백히 여성적인 힘, 즉 ‘잠자는 여신’으로 묘사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생명 에너지 (프라나), 생각, 감정, 욕망 등은 모두 이 거대한 쿤달리니 에너지의 극히 일부가 깨어나 활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궁극의 힘은 평생 동안 잠들어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다 (Īḍā)와 핑갈라 (Piṅgalā)라는 좌우의 이원적인 나디(Nāḍī) 속에서만 에너지를 소모하며, 분리된 자아 (에고)로서의 제한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탄트라 수행, 특히 하타 요가 (Hatha Yoga)의 진정한 목적은 다양한 수행 (아사나, 프라나야마, 쿰바카, 반다, 무드라 등)을 통해 몸과 나디를 정화하고 이다와 핑갈라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마침내 이 잠들어 있는 여신, 쿤달리니를 각성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탄트라 수행 과정 전체는 곧 내 안에 잠든 샥티 (쿤달리니)를 깨우고, 그녀를 공경하며, 그녀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장엄한 내면의 숭배 의식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몸을 여신이 거주하는 신성한 사원(神殿)으로 여깁니다. 아사나와 프라나야마는 이 사원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화하는 행위입니다. 만트라와 얀트라는 여신을 부르고 그녀와 소통하는 신성한 도구입니다.

깨어난 쿤달리니 샤크티는 척추 안의 중심 통로인 수슘나 나디 (Suṣumnā Nāḍī)를 따라 위로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에너지의 상승이 아니라, 내재된 신성 (샥티)이 자신의 근원인 순수한 의식(시바)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녀는 상승하는 과정에서 각 차크라 (Cakra)의 문을 열고, 그곳에 묶여 있던 무지와 속박의 매듭 (granthi, 그란티)을 불태워 해체시킵니다. 마침내 그녀가 머리 꼭대기 정수리, 즉 사하스라라 차크라(Sahasrāra cakra)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영원히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연인 시바와 재회할 때, 완전한 합일(合一)이 이루어집니다. 이 황홀한 내면의 결혼 속에서 개별 자아는 녹아내리고, 수행자는 자신이 곧 우주 전체와 하나인 시바-샥티 그 자체임을 깨닫는 궁극의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탄트라 수행의 전 과정은 샥티를 깨우고(각성), 샥티를 이끌고 (상승), 샥티와 합일하는 (깨달음) 것입니다. 샥티는 길 (Path)이자, 그 길을 가는 힘 (Energy)이며, 마침내 도달하는 목적지 (Goal, 시바와의 합일) 그 자체입니다. 시바가 움직이지 않는 목적지라면, 샥티는 그 목적지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유일한 길이자 운반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트라는 그 어떤 원리보다도 여성적인 힘, 즉 샥티를 숭배하고 그녀의 힘에 의지하는 것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탄트라의 흐름 속에서도 특히 샥티즘 (Shaktism)이라고 불리는 전통에서는 이러한 샥티 숭배가 더욱 궁극적인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샥티즘에서 샥티는 단순히 시바의 힘이나 배우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시바를 포함한 모든 것의 근원이며, 그 자체가 최고의 절대 실재 (Supreme Absolute Reality)로 숭배됩니다.

이 관점에서 시바는 샥티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 즉 그녀의 순수 의식 측면일 뿐이며, 그 의식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샥티의 무한한 본성 안에 포함됩니다. 그녀는 모든 원인을 넘어선 원인이며, 이 우주는 그녀의 의지 (Icchā-Śakti, 잇차-샥티), 지식 (Jñāna-Śakti, 즈냐나-샥티), 행위 (Kriyā-Śakti, 크리야-샥티)라는 세 가지 힘을 통해 펼쳐집니다. 샥티즘의 수행자들은 위대한 어머니 (Mahādevī, 마하데비)인 그녀를 다양한 모습으로 숭배합니다. 예를 들어, 다샤 마하비드야 (Daśa Mahāvidyā), 즉 ‘열 가지 위대한 지혜의 여신들’은 샥티가 가진 우주적인 힘의 열 가지 다른 측면을 보여줍니다. 창조의 힘 (부바네슈와리), 파괴와 시간의 힘 (칼리), 아름다움과 풍요의 힘 (카말라), 욕망과 유혹의 힘 (트리푸라 순다리), 심지어 죽음과 무질서의 힘 (두마바티, 친나마스타)까지도 모두 여신의 신성한 유희로 받아들이고 숭배합니다.

이처럼 샥티를 궁극적인 실재로 숭배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그 어떤 측면도, 심지어 가장 두렵거나 고통스러운 측면조차도 신성의 표현이 아닌 것이 없다는 비이원론적 통찰의 극치입니다.

탄트라가 여성적 힘인 샥티를 숭배하는 이유는 결코 단순히 여성이라는 성 (性)을 숭배하거나 남성성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탄트라가 가진 깊은 철학적·실천적 지혜의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첫째, 샥티는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실 세계 그 자체이므로, 그녀를 숭배하는 것은 삶을 긍정하고 현실 속에서 깨달음을 찾으려는 태도의 표현입니다.

둘째, 샥티는 우리를 속박하는 힘 (마야)이자 동시에 해방시키는 힘 (은총)이므로, 그녀에게 헌신하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직접적인 길입니다.

셋째, 샥티는 우리 몸 안에 쿤달리니라는 궁극의 잠재력으로 내재해 있으며, 이 내면의 여신을 깨우고 그녀를 인도하는 것이 탄트라 수행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일부 전통에서는 마하샥티 (Mahaśakti)가 모든 것의 근원인 궁극의 실재 그 자체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탄트라는 이처럼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며, 때로는 두렵기까지 한 삶의 모든 에너지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위대한 어머니’의 신성한 힘으로 껴안고 숭배함으로써, 마침내 그 에너지의 근원인 순수한 의식과의 완전한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장엄한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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