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1. 시바: 움직이지 않는 순수한 의식

by이호창

제3-10장: 우주를 춤추게 하는 두 힘: 시바와 샤크티



3-10.1. 시바: 움직이지 않는 순수한 의식



탄트라 (Tantra)의 지혜는 우주 만물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틀을 제시합니다. 이 거대한 우주와 그 안의 모든 생명 현상은 두 가지 거대한 원리의 영원한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 첫 번째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순수한 의식’이며, 두 번째는 그 의식 위에서 춤추는 ‘역동적인 에너지’입니다. 이 두 힘은 분리될 수 없지만, 우리는 먼저 그 첫 번째 원리, 즉 움직이지 않는 순수한 의식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탄트라 전통은 이 근원적인 의식,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참된 나를 시바 (Śiva)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시바’라는 이름을 들을 때, 종종 힌두교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강력한 신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이마에 제3의 눈을 가지고, 손에는 삼지창을 들며, 목에는 뱀을 두른 채 히말라야에서 명상하는 파괴의 신 시바입니다. 물론 이러한 신화적인 형상 또한 깊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부터 탐구할 탄트라 철학에서의 시바는, 그러한 특정한 인격이나 형상을 넘어서는 훨씬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우주의 원리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시바는 어떤 행위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행위와 모든 존재가 그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탕 그 자체, 즉 ‘순수한 의식 (Pure Consciousness)’을 의미합니다.

탄트라 사상은 이 순수한 의식을 칫 (Cit) 또는 차이타냐 (Caitanya)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생각’이나 ‘감정’과는 다릅니다. 생각과 감정은 마음 (citta, 칫따)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파도와 같은 ‘작용’입니다. 하지만 칫 (Cit)은 그 모든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비추어 아는 근원적인 ‘빛’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식하는 내용이 아니라, 의식할 수 있게 하는 ‘앎의 능력’ 그 자체입니다. 이 순수한 의식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빛과 같습니다. 빛 자체는 어떤 형태나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빛이 있기에 우리는 비로소 다양한 형태와 색깔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바라는 순수한 의식은 그 자체로 어떤 성질이나 내용, 혹은 움직임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며, 모든 존재와 모든 경험을 비추어 알게 하는 고요하고 영원한 바탕입니다.

이러한 시바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바로 ‘움직이지 않음 (Unmoving)’입니다. 탄트라 문헌들은 시바를 종종 니쉬찰라 (Niścala) 또는 스타누 (Sthāṇu)라고 부르는데, 이는 ‘흔들림 없는’, ‘미동도 없는’, 혹은 ‘굳건히 서 있는 기둥’을 의미합니다. 왜 의식은 움직이지 않아야 할까요? 움직임이란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거나, 어떤 결핍을 채우기 위해 변화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시바라는 순수한 의식은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원한 실재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변할 필요도 없고, 어딘가로 갈 필요도 없으며, 무언가를 얻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변화와 움직임이 일어나는 무대이지만, 정작 무대 자체는 결코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깊고 거대한 바다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다의 표면 위에는 바람에 따라 수많은 파도가 격렬하게 일어나고 부서지며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하지만 저 깊은 바다의 밑바닥, 심연 (深淵)은 그 모든 표면의 소란스러움과 관계없이 늘 고요하고 움직임 없는 정적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격렬하게 춤추는 파도가 에너지, 즉 샤크티 (Śakti)라면, 그 모든 춤을 가능하게 하는 묵직하고 깊은 바다의 본체, 그 고요한 바탕이 바로 시바입니다.

또한 영화관의 스크린을 비유로 들 수도 있습니다. 스크린 위에는 기쁨과 슬픔, 전쟁과 평화, 탄생과 죽음 등 온갖 극적인 장면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그 모든 영상은 스크린이라는 변함없는 흰 바탕 위에서만 상영될 수 있습니다. 스크린 자체는 영화 속의 어떤 사건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어떤 장면이 상영되든 늘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시바는 바로 이 스크린과 같이, 우주라는 거대한 영화가 상영되는 움직이지 않는 바탕입니다.

따라서 시바는 어떤 행위의 주체가 아닙니다. 그는 창조하거나, 유지하거나, 파괴하는 행위를 직접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존재할 뿐 (Being)’입니다. 이러한 시바의 역할을 탄트라에서는 삭쉬 (Sākṣī), 즉 ‘증인 (Witness)’ 또는 ‘관찰자’라고 설명합니다. 시바는 우주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현상과 에너지의 춤을 그저 고요히, 아무런 판단이나 개입 없이 바라보는 순수한 관찰자입니다. 그는 기쁨의 장면에 함께 기뻐하지도 않고, 슬픔의 장면에 함께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비추되, 그 비추는 대상에 물들거나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가 철학에서 말하는 순수한 의식, 푸루샤 (Puruṣa)의 속성과도 매우 유사합니다. 푸루샤 역시 물질 자연 (Prakṛti, 프라크리티)의 변화무쌍한 활동을 그저 지켜보는 초연한 관찰자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탄트라의 시바는 단순히 수동적이고 분리된 관찰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독특한 의미를 지닙니다. 시바는 비록 스스로 움직이지 않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바로 모든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됩니다. 그는 마치 강력한 자석과 같습니다. 자석 자체는 가만히 그 자리에 있지만, 그 보이지 않는 자기장 (磁氣場)의 힘이 주변의 쇠붙이 (에너지, 샤크티)들을 끌어당기고 춤추게 만듭니다. 시바의 고요한 현존 (Presence)이 없다면, 에너지는 춤출 무대도, 춤출 이유도, 그리고 그 춤을 알아차릴 빛도 잃게 됩니다.

즉, 시바의 움직임 없는 순수한 의식은 샤크티라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자신을 펼쳐내고 창조의 유희 (Līlā, 릴라)를 벌일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자, 그 모든 유희가 되돌아가 쉴 수 있는 궁극적인 안식처입니다.

이처럼 탄트라가 말하는 시바는 우주의 남성적 원리 (Masculine Principle)이자, 모든 변화 너머에 있는 불변의 실재, 모든 소음 너머의 영원한 침묵, 그리고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한 빛의 근원입니다. 그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의식이지만, 동시에 모든 움직임의 중심이자 목적지입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 모든 생각과 감정, 감각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진 그 중심에는 바로 이 시바의 고요한 빛이 항상 빛나고 있습니다. 요가와 탄트라 수행의 여정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산란하게 하는 표면의 파도들을 가라앉히고,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인 이 깊고 움직임 없는 순수한 의식, 시바의 상태를 다시 깨닫고 그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3-9.5. 좌도와 우도: 두 개의 길, 하나의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