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지금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었을까.
오래된 서랍을 열어보면 빛바랜 일기장에서 ‘만약에’의 시나리오들이 펼쳐지는 것을 본다. 피아니스트가 되어 무대 위에서 몰입하고 있었을 수도 있는... 혹은 칠판 앞에 서서 눈이 반짝이는 아이들과 시 구절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 나누고 있을 선생님이 되었을 수도 있는 나...
어느새인가 모르게 지나온 세월이 켜켜이 쌓여 버린 지금, 굳이 평행세계의 가상의 이력서들을 문득 들춰보게 되는 날이 있다. 대체 왜 우리는 이미 지나버린 과거를 이토록 반추하는 걸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사실적 사고’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미 일어난 상황의 반대 혹은 다른 선택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일종의 뇌 시뮬레이션이다. 신기하게도 이 상상은 대개 현실이 조금 팍팍하고 고단할 때 찾아온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혹은 설명하기 묘한 감정이 밀려올 때 뇌는 아주 본능적으로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던' 백지 같은 그 시절을 소환한다.
모든 가능성이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던 그 시절. 당시에는 망망대해에 놓인 그 불확실함이 거대한 짐처럼 느껴졌을지 몰라고, 이미 인생의 결과가 어느 정도 윤곽을 다 드러낸 지금에서는 동경의 대상이 된다.
어림 혹은 젊음은 아직 아무것도 굳어지지 않은 가능성의 총량이 큰 상태다. 무엇이든 해 볼 수 있고, 잘못 끼운 단추를 언제든 다시 풀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 특권.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시간과 기회가 꽤 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제 보니 엄청난 자본인 걸 깨닫게 된다(물론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줄 세우기 평가에 중독된 한국 슬롯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결국 그 찬란한 백지 위에 스스로 선을 긋고 색을 채워 넣음으로써, 분명 여백이 줄어들어간다. 어떤 획을 긋고 어떤 색을 그려 넣는 순간, 그와 연결되었던 수십 개의 평행세계와 가능성들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좁혀진다. 피아니스트. 국어 교사의 선택지와 가능성들은 이 세상에서 지워진 것처럼 멀어져 갔다.
그래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곧 ‘가능성이 줄어드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쪽 길을 선택했으니 저쪽 길은 영영 가볼 수 없다는 아쉬움, 인생의 궤도가 점점 좁아지고 단단해져서 이제는 쉽게 선을 바꿀 수 없다는 막막함이 엄습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백지 위에 이미 그려진 것은, 내가 선택하고 내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과 발자국의 흔적이다. 켜켜이 쌓일수록, 삶의 밀도와 내공은 깊어지면서, 전체의 그림의 구도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젊은 날의 가능성이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불안정한 힘’이었다면, 지금의 가능성은 ‘내가 쌓아온 터전 위에서 나만의 색깔로 깊이를 더해가는 힘’에 가깝다.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점프하는 가능성이 사라진 대신, 현재의 나라는 토대 위에서 삶의 방식을 미세하게 조율하고 깊이 있는 결을 만들어갈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