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학원 원장님의 권유로 보게 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오디션. 발레, 탭댄스, 재즈, 힙합, 아크로바틱, 연기, 노래 등 오랜 기간 훈련한 후 2010년, 나는 빌리가 되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12살 소년에게는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춤과 연기, 노래를 하면서 3시간 가까이 되는 긴 호흡의 무대를 퇴장 없이 홀로 이끌어간다. 오죽하면 마라톤을 하면서 ‘햄릿’을 연기하는 것 같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일까.
그래도 모든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무대에서 원 없이 춤출 수 있어서 좋았고, 발레가 아닌 새로운 장르를 접하는 것도 즐거웠다. ‘빌리는 나처럼 춤을 정말 사랑하는 아이구나’라고 공감하며 작품 속에 뜨겁게 몰입했다. 돌이켜보면, 그만큼 무대에서 행복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된 시간을 잘 견뎌내지 않았을까 싶다.
<빌리 엘리어트> 마지막 공연이 다가올 때쯤, 그동안 함께한 빌리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어려운 상황에 닥쳐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너처럼, 나도 열심히 춤을 춰 꼭 멋진 발레리노가 되겠다’고. 빌리를 떠나보내며 함께한 ‘약속’이었다.
그리고 16년이 흘렀다. 난 약속을 지켰고, 빌리처럼 유니버설발레단을 대표하는 발레리노가 되었다. 물론 빌리를 떠나보낸 이후의 16년 또한 순탄치 않았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상이란 깊은 터널을 지나는 시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발레 슈즈를 신었다. 빌리와 한 약속이 있으니까.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으니까. 빌리는 매 순간 나를 연습실로 이끌어 주었던 원동력이었다.
2024년, 발레단 공연을 한창 하고 있을 때 <빌리 엘리어트> 국내 협력 안무가이신 ‘신현지’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2026년에 <빌리 엘리어트> 네 번째 시즌이 찾아오는데, ‘성인 빌리’ 역으로 출연할 수 있겠냐고. 감사한 제의였다. 너처럼 멋진 발레리노가 되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지키고 다시 마주한 빌리.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나의 춤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대답은 당연 ‘네!’였다. 특히나 신현지 선생님은 내가 빌리였던 시절, ‘성인 빌리’역을 맡으셨던 분이다. 그분으로부터 ‘성인 빌리’ 역 제의를 받았다는 것도 내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중 ‘성인 빌리’가 등장하는 장면은 ‘드림 발레(Dream Ballet)’다. 나는 ‘성인 빌리’이기 전에 ‘빌리’였기에, 이 드림 발레가 극에서 얼마나 중요한 장면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버지와 형의 반대로 춤을 포기하게 된 빌리. 크리스마스 밤, 홀로 남은 마을 회관에서 ‘백조의 호수’ 음악을 듣게 되고 춤이 금지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슈즈를 신는다. 의자를 빙글빙글 돌린다. 윌킨슨 선생님과 열심히 연습했던 춤을 시작한다. 그 순간, 빌리는 무의식에서 자신의 미래를 마주한다.
발레리노가 된 자신의 미래와 함께 추는 파드되. ‘성인 빌리’는 춤을 열망하는 자신의 과거와 눈을 맞추며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다. 어두운 탄광촌을 떠나 빛나는 곳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빌리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로 춤을 춘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드림 발레 연습 첫날, 새로운 4대 빌리 아이들을 만났다. 귀엽고 똘망똘망 한 아이들이었다. 꼭 친동생을 만난 것 같았다. 빌리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친동생. 연습은 즐거웠다. 안무, 대사, 노래… 모든 게 다 기억났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을 하고 있었다. 16년 전으로 추억 여행을 하는 느낌. 리허설을 할 때도 이렇게 설렌데, 본 공연은 어떨까. 무대에 서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공연 당일이 찾아왔다. 2막, 크리스마스 파티 이후 홀로 남겨진 빌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백조의 호수’. 춤을 출까 말까 고민하던 빌리는 끝내 슈즈를 신고 의자를 돌렸다. 그 신호에 맞춰 나 역시 의자를 들고 무대로 들어섰다. 익숙한 멜로디, 바닥을 자욱이 채우는 안개, 오직 ‘빌리’만을 비추는 두 개의 조명, 모든 것이 똑같았다. 16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서있는 위치였다. 언제나 무대의 앞쪽에서 의자를 돌리던 내가 이젠 무대의 뒤편에서 빌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림 발레’의 하이라이트, ‘플라잉(Flying)’ 장면. 빌리가 날 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나도 빌리와 눈을 맞추며 웃음을 보였다. 16년 전, 신현지 선생님이 내게 미소를 지어주셨던 것처럼. 그 미소에 큰 힘을 받았던 따스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빌리의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추어 힘껏 날려주었다. 내 손을 떠난 빌리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순간, 하늘을 나는 빌리의 모습에서 16년 전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16년 전, 하늘을 날며 발레리노의 꿈을 꾸었던 내가 보였다.
그와 동시에, 빌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떤 단어로 그때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드림 발레’를 마치고, 백스테이지로 돌아왔다. 신현지 선생님께서 날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선우야, 어때.”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그냥… 너무 좋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기분 좋게 쿵쿵거리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울컥할 정도로 감사하고 행복했기에.
나는 무대에서 ‘16년 전의 나’를 만났다.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도. 서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월간 에세이 7월호)
(사진 : 신시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