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는 빛으로 그리움을 긷다
“저는 그냥 시를 써서 필요한 곳에 사용하면 되지 구태여 시집을 출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는 흩어진 시를 한곳에 모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그리움을 하나씩 나누어 드립니다. 한 분이라도 행복하다면 저도 행복합니다.” -김정희
흩어진 마음들이 모여 별이 되기까지
바카라장을 넘기기 전, 시인의 머리말에서 발길이 멈춘다. 사람들은 이미 그가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중견 문인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이 시집은 시인이 세상을 향해 내어놓는 ‘첫’ 결실이다. 그간 동인지와 신문 연재, 수많은 행사 현장에서 낭송되며 사람들의 귓가를 맴돌던 시어들이 비로소 한 권의 종이집을 얻어 안착한 것이다.
시인의 사부인 성재경 선생은 “시인의 명함은 시집”이라 일갈했다고 한다. 그 말씀에 용기를 내어 흩어진 시들을 모았다는 시인의 고백에서, 문학을 향한 겸손과 진정성을 읽는다. 에세이스트로서 나는 하나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수천 자의 문장을 동원하지만, 시인은 그 수천 자의 감정을 ‘그리움’이라는 단어 하나에 압축해 넣는다. 이 시집은 그렇게 모인 그리움의 파편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독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기록이다.
어머니, 그리움의 가장 깊은 뿌리
시집의 목차를 살피며 가장 먼저 가슴을 친 것은 ‘어머니’라는 세 글자다. 시인은 「바다와 어머니」, 「나의 어머니」를 시작으로 「어머니의 텔레파시」, 「어머니의 초능력」, 「어머니의 문전옥답」을 지나 「어머니의 삶」, 「어머니의 물지게」, 「어머니의 빨래터」에 이르기까지 집요할 정도로 어머니를 노래한다.
나 같은 에세이작가는 어머니의 고생스러운 일생을 연대기순으로 나열하며 독자의 눈물을 짜내려 애쓰겠지만, 김정희 시인은 ‘물지게’와 ‘빨래터’라는 단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그 시절 어머니의 굽은 등과 시린 손마디를 복원해낸다. 시인이 가진 함축의 미학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어머니를 그 빈 공간에 대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늘 감탄해 마지않는 시인만의 마법이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붙잡는 시선
시인은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생의 진리를 발견한다. 「봄나들이」, 「봄을 입다」에서 피어난 생명력은 「여름 바다」의 뜨거움을 거쳐 「가을 낙엽」, 「가을 빛」, 「가을 단감」의 성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하얀 눈」과 「눈꽃」, 「얼음 꽃」의 정막 속에서 한 해를 갈무리한다.
특히 「코스모스 사랑 법」이나 「장미의 유혹」, 「호박꽃」, 「접시꽃」 등 꽃을 관찰하는 시인의 시선은 유독 다정하다. 에세이 작가가 풍경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면, 시인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 풍경 자체가 되어버린다. 흩어져 있는 자연의 상황들을 모으고 모아 시어라는 보석으로 빚어내는 그 능력이 부럽고도 대단하다.
역사적 아픔과 지역을 향한 애정
시인의 시선은 내면의 뜰에만 머물지 않는다. 「유관순 열사를 기리며」, 「6.25 그날의 아픔」, 「호국영령을 기리며」, 「다부동 전투」와 같은 작품들은 역사의 파고 속에서 희생된 넋들을 기리는 시인의 단단한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동시에 「대전부르스 0시 축제」, 「보문산 보리밥」, 「아름다운 대청호」 등 자신이 뿌리 내리고 사는 지역의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시가 고고한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터전 위에서 피어나는 꽃임을 증명한다. 거창한 담론이 아닌 ‘보리밥’ 한 그릇에서 시를 찾아내는 시인의 감수성이야말로 에세이 작가가 배워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일상의 재발견과 통찰
「고구마」, 「사과」, 「추억의 배추된장국」처럼 식탁 위의 평범한 소재들도 시인의 손을 거치면 특별한 서사를 입는다. 작가로서 내가 독자에게 “이것은 이래서 중요하다”라고 설득할 때, 시인은 「닮은 것이 아니라 닮아졌다」라는 제목 하나만으로 관계의 깊이를 성찰하게 만든다. 시집 곳곳에 배치된 이러한 함축적 장치들은 읽는 내내 나를 멈춰 서게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시라는 빛으로 그리움을 긷다
시를 읽는 내내 나는 시인이 가진 ‘언어의 경제성’에 압도당했다. 넓게 펼쳐진 상황들을 한 점으로 모으는 그 응축의 힘이 이 시집에는 가득하다. 시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시평」 앞에 놓인 시편들은 하나하나가 독립된 우주이면서도 결국 ‘그리움’이라는 하나의 행성으로 수렴된다.
시인은 서문에서 “그리움을 하나씩 나누어 드립니다”라고 했다. 그가 건넨 그리움의 조각들을 하나둘 가슴에 담으니, 시라는 장르가 어렵게만 느껴졌던 나의 경계심도 조금은 허물어지는 기분이다. 문장 하나를 빚기 위해 수만 번 고뇌했을 시인의 진심이 이 바카라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에세이 작가로서 세상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겠지만, 가끔은 김정희 시인처럼 말을 아끼고 침묵 사이에 그리움을 채워 넣는 법을 배워야겠다. 이 시집은 나에게 문학적 영감인 동시에, 삶의 본질을 꿰뚫는 응축의 미학을 가르쳐준 귀한 스승이다. 별 하나에 그리움을 싣고 날아온 시인의 따뜻한 시어들이, 더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서 지지 않는 별로 남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