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 전문가의 관점으로 본 래미안 신규 BI
2026년 8월 31일,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변화하는 주거 패러다임에 따라 래미안(RAEMIAN) 브랜드 아이덴티티 체계를 재정립하고 새로운 브랜드 지향점과 BI를 공개했다. 이번 래미안 BI 리뉴얼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자 한다.
한국의 주거 브랜드들은 지금껏 외형 성장에 집중해 왔다. 이를 대표하는 아파트는 급격한 도시화로 폭증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효율적인 대안이었다. 그 결과 대량 보급된 성냥갑 형태의 아파트 단지들은 획일적인 구조로 ‘더 높게, 더 넓게’라는 외형적 경쟁을 자랑으로 삼아 왔다. 문제는 주거 브랜드가 이룬 외형적 성취가 거주자의 삶의 질을 대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파트 개발의 목적이 제한된 땅 위에서 초과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건설경제의 논리에 기반해 왔기 때문이다. 거주민의 개성과 취향은 찾기 어렵고, 자산으로서의 가치만 남은 획일적인 주거 경험. 그것이 지난 60여 년간 답습한 주거 문화였다.
2025년 헤더윅 스튜디오(Heatherwick Studio)의 설문조사 결과, 서울 시민 응답자의 97%가 현재의 아파트 단지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시민들은 아파트라는 공간이 생기 없는 지루함과 숨이 막힐 듯 답답함을 유발한다고 답했다. 과밀한 도심에서 피로에 지친 인간을 회복시키는 휴식의 공간, 개인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주거에 대한 갈증은 보편적인 니즈가 되었다.
이 시점에 래미안이 선언한 ‘From Height to Depth(높이에서 깊이로)’라는 지향점은 시대의 니즈를 정확히 읽어낸 이정표임이 분명하다. 높이로 대변되는 외형 경쟁의 효용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고, 주거 경험을 보는 고객의 가치관은 한층 성숙해졌다. 이제 주거 브랜드의 경쟁력은 기존과 다른 차원에 있다. ‘라이프 컬처 브랜드(Life Culture Brand)’로의 진화를 선언한 래미안은 입주민의 취향과 편의를 세심하게 고려한 서비스와 상품을 바탕으로, 일상에 깊이를 더하는 주거 경험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발표된 신규 BI에서 브랜드가 선포한 새로운 정체성은 과연 선명하게 드러나는가? 평면적 일상에서 벗어나 깊이에 집중하는 몰입을 상징했다는 3개의 수직선 심볼에서 어떤 깊이를 느끼기는 힘들다. 래미안이 내세운 핵심 가치는 획일화된 기준보다 개개인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한다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고유성)’이지만, 재구성된 세 개의 수직선 심볼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획일적이고 평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동일한 직사각형이 반복되는 평면적 형태의 심볼은 외려 지난 60여 년 동안 규격화되었던 서울 아파트의 건축 양식을 연상케 한다. 심볼의 디자인이 얼마나 세련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브랜드가 새롭게 선언한 가치와 그것을 구현한 형태 사이에 충분한 맥락과 설득력이 존재하는지가 문제다.
근본적인 문제는 브랜드 자산으로서의 존재 가치, 즉 상징성이다. 웹사이트나 모바일에서 흔히 메뉴를 나타내는 기능용 아이콘으로 사용되는 삼선 라인의 디자인은 어느 스톡 이미지 사이트에 검색해도 수천 개의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 누가 그런 그래픽을 보며 래미안의 고유한 상징과 가치를 연상할 수 있을까? 대중은 물론이고 브랜드 관계자조차 래미안의 심볼을 구별하기 힘들 것이다. 브랜드 정체성은 누구나 사용하는 보편적 형태의 그래픽이 아니라 구별된 상징으로 존재해야 한다. 브랜드 철학이나 디자인 의도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브랜드가 지향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완성도 높은 브랜드 자산의 특징이다.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마리나 베이 샌즈(Marina Bay Sands)는 세 개의 타워를 모티브로 한 ‘3선의 세로 라인’을 활용하지만 래미안과 다른 차원의 상징성을 획득했다. 세 개의 타워와 배 모양의 스카이파크 실루엣을 세심하게 정제한 심볼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인 영원한 우아함(Timeless elegance) 직관적으로 전한다.
디지털 화면과 간판, 굿즈 등 어떤 매체에서도 상징성을 유지하는 마리나 베이 샌즈의 강력한 심볼은 시간이 축적될수록 시대의 아이콘으로 진화하며, 브랜드가 지향하는 'Above Beyond'라는 메시지를 강화한다. 이상적인 브랜드 상징이란 이러한 힘을 발휘한다. 단순한 형태의 그래픽과 정제된 심볼 사이에는 비할 바 없는 가치의 차이가 존재한다.
지난 26년간 쌓아온 고유 컬러를 버리고 블랙 앤 화이트를 브랜드 컬러로 채택한 행위 또한 적합했는지 의문이다. 단순 물리적 공간 설계를 넘어, 고객의 삶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드는 ‘Life Culture Brand’가 되겠다는 브랜드 선언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흑백이라는 절제된 컬러로 주거의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컬러는 브랜드 고유의 가치와 인상을 전하는 핵심적인 자산으로 작용한다. 맥도널드 심볼의 골드, 코카콜라의 레드, 티파니의 시그니처 블루가 사라진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들이 추구하는 브랜드 가치가 지금처럼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을까? 컬러에는 무미건조한 무채색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긍정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힘이 있다. 삶의 밀도와 풍성함을 더하겠다는 래미안의 철학을 전하기에 컬러만큼 효과적인 요소는 없을 것이다. 이를 배제하려면 보다 상징성 높은 형태의 심볼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일관된 인상을 축적했던 기존 컬러를 지워버린 결과, 래미안의 3선 심볼은 무색무취의 평이함으로 귀결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는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해외 에이전시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역량이 탁월한 브랜딩 에이전시라도 타 문화권의 브랜드를 100%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개별 브랜드 자산의 퀄리티는 뛰어나더라도 맥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보이는 것이다. 브랜드가 지닌 서사에는 그 나라 고유의 언어, 문화, 정서가 깊이 녹아있다. 우리가 북유럽의 주거 문화와 삶의 방식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듯, 그들 역시 한국만의 독특한 주거 문화를 정확한 맥락 속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대한항공의 BI 리뉴얼을 담당한 글로벌 에이전시 리핀코트(Lippincott)는 기존 태극 심볼을 상모놀이의 모자끈에서 착안한 얇은 라인으로 리뉴얼하여 화제를 모았다. 상모놀이의 모자끈으로 태극 마크의 상징성을 대체하겠다는 신선한 아이디어는 문화적 맥락에서 자유로운 외국 에이전시였기에 가능한 해석이었다. 동시에 이는 대한항공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국적기로서의 상징성과 무게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했다.
래미안의 새로운 BI 디자인 시스템을 정립한 스웨덴의 브랜드 에이전시, 스톡홀름 디자인 랩(SDL, Stockholm Design Lab)은 북유럽의 미니멀리즘을 디자인 철학으로 삼고 있다. 이들의 철학은 스웨덴 전기차 브랜드, 폴스타(Polestar)의 미니멀하고 미래 지향적인 비주얼 아이덴티티에서 특히 강점을 발휘했다. 그러나 북유럽의 미니멀리즘을 한국 브랜드에 적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들이 진행한 한솥도시락의 BI 리뉴얼 역시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IT 기업처럼 세련되고 현대적인 이미지를 얻었다는 평과 함께, 친근하고 따스한 이미지와 F&B 브랜드의 정체성이 사라졌다는 시선이 엇갈렸다. 결론적으로 이는 브랜드보다 에이전시의 미학이 돋보였던 프로젝트로 남았다.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가? 근본적인 원인은 브랜드를 보는 미숙한 관점에 있다. 하나의 브랜드가 오랜 기간 축적한 브랜드 자산은 시대와 문화라는 맥락 속에서 피어난 산물이다. 브랜드의 디자인 역시 그렇다. 브랜드의 가치와 철학을 전하는 시각 언어인 브랜드의 디자인 자산은 미묘한 표현의 차이만으로도 전혀 다른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아무리 트렌디한 디자인 시스템으로 리뉴얼을 단행하더라도 맥락에서 벗어난 브랜드 자산은 브랜드 가치와 메시지를 왜곡시킬 뿐이다.
아이코닉한 브랜드에는 명확한 주제의식과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그들은 하나의 주제를 근거로 브랜드 자산을 구축하고, 모든 브랜드 활동에서 일관된 맥락을 만들어 낸다. 모든 문장이 오직 하나의 주제를 향해 전개되는 소설처럼, 개별 브랜드 자산에도 마땅한 존재 이유가 있다. 시대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훌륭한 자산은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에 고유한 울림을 더한다. 단편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고 브랜드의 모든 활동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브랜딩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단지 표면에 머무는 심미적 감도가 아니라, 브랜드를 둘러싼 시대적 맥락, 사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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