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서 채식하기: 난이도 상)
서울에서 채식 외식하기 좋은 동네들이 있는데 나의 개인적 데이터에 따르면 그중 1위는 망원동이고, 2위도 망원동이고.. 3위는 이태원/연희동이라고 해두자. 그 동네의 채식 맛집이 5초 안에 3군데 이상 바로 떠오르면 그곳이 순위권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걷기 좋은 동네! 서울의 중심! 종로/광화문 일대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상당히 어려웠다.
사찰음식 전문점인 발우공양은 점심 먹으러 캐주얼하게 들어가기엔 가격대가 세고 보통은 예약을 해야 하며 오세계향은... 왠지 처음 방문 이후로는 끌리지 않았다.
이럴 때 가장 만만한 곳은 메밀 막국수나 김밥을 먹는 것인데, 오늘은 왠지 다른 걸 찾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왜냐면 어제와 그제도 김밥을 먹었고, 최근 열흘 사이에 메밀 막국수를 3-4회 이상 먹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먹었다가는... 좋아하는 음식들에 대한 애정이 식을 것 같아 정말 먹고 싶을 때에만 먹고 싶었다.
종각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길 조계사 뒤편의 식당 간판과 메뉴들을 쭉 읽어본다.
소고기국밥, 낙지볶음, 알탕, 해물탕, 제육볶음, 순대 국밥, 설렁탕, 고기만두, 스테이크 솥밥.
채식을 하기 전의 나라면 '오늘은 뭘 먹을까?'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둘러봤을 글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외로운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역시 채식인들을 위한 식당은 없군...
인사동 거리를 쭉 걸었다. 중간중간 작은 골목도 들어가 보고, 길게 줄지어 있는 만둣집 사장님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기 없는 만두는 없겠죠..?' 물어도 봤으나 없다. 진짜 없다. 결국 예술김밥에 가서 햄빼고 나물 김밥을 시켜 먹었다. 그렇게도 좋아하는 김밥인데 왠지 입이 텁텁했다.
그러다 지난 4월의 타이페이가 떠올랐다.
신세 지던 친구 집 2분 거리의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식당.
주인아주머니께 여쭤봤다.
나: '야채만 들은 만두도 있나요?'
아주머니: '여기 채식 식당이에요!!!'
나: (기쁨의 내적 비명)
만두를 손에 들고 근처 카페에 가니 감사하게도 야외 자리에서 커피와 함께 편하게 먹으라고 하셨다.
적어도 100살은 되어 보이는 멋진 나무 아래 앉아 직접 빚으신 만두를 입안 가득 넣고 먹으며 생각했다.
'아! 타이페이 살면 다음 끼니는 뭘 먹을지 고민하는 게 얼마나 즐거울까' 하고.
타이페이에서는 면, 만두, 볶음밥, 볶음요리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채식 옵션이 있거나, 채식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도 많다. 대만 친구에게 물어보니 대만에서는 도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 인구가 많고 (인구의 약 13%), 평소에는 고기를 먹더라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채식을 하는 풍습이 자리 잡아 있다고 했다. 만나는 사람 중 열 명의 한 명은 채식을 하는 셈이다. 이런 대만에서는 매일 끼니를 고민하는 게 즐거웠다.
다시 서울로.
� 다음엔 어느 비건 식당에 가볼까 고민하는 것은 즐겁다.
� 집에서 채식 요리를 하는 것 역시 매우 즐겁다.
� 가볍게 밖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때 선택지가 김밥과 메밀국수뿐이다 - 덜 즐겁다.
난 먹보라서 가끔은 만두도 먹고 싶고, 따뜻한 국밥도 먹고 싶고, 잔치국수도 먹고 싶다.
메밀국수를 계속해서 좋아하고 싶고,
김밥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고 싶다.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나만의 방식으로 작은 변화를 만들어보자.
스톡홀름이나 베를린, 런던처럼 채식 옵션이 많은 도시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
더 많은 사람들이 채식 옵션을 원하고 찾는다면 어떤 멋진 날엔
서울에서도 다시 설렘을 가지고 점심 메뉴를 고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