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이유
앞 글에서도 말했듯, 내가 한국 S사 연구소에서 팀장을 맡게 된 계기는 새로운 연구 과제를 발굴해 차상위 상사에게 제안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위해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준비했다. 우선 평소 눈여겨보던 미국의 빅테크 업체들의 연구 동향을 몇 년간 지속적으로 관찰했다. 각 기업체 연구소에서 해마다 발표한 주요 논문들을 읽고 기술군들을 묶어서 정리해 두었다. 그리고 해다마 학회 출장을 다닐 때, 참가자들을 만나서 어떻게든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 학회장에서 기업체 연구원, 대학의 교수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과 의견, 정보를 교환했다.
기업체 연구원들은 자신의 회사 내부 사정이나 계획 등에 대해 정보를 쉽게 주지 않는다. 당연하다. 보안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건 S사를 대표한 출장자였던 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화라는 것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적정 수준에서 내 이야기를 해야 상대방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공통의 관심사인 '기술 그 자체'나, 보안 사항이 아닌 수준에서 내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게 이들이 이야기한 자신의 기술, 해당 분야에 대한 견해 등을 최대한 취합했고, 행여나 하나라도 놓칠세라 밤에 호텔로 돌아오면 바로 기록해 두었다.
대학 교수들은 좀 더 대화에 열려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학계에 발표한 기술이 업계에 사용되는 것을 매우 바라는 입장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해외 대학 교수들도 연구비 펀딩에 언제나 목마르고, 이를 위해 호시탐탐 업계와 파트너십 기회를 찾는다. 따라서 기업에서 온 연구원이나 엔지니어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며 자신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편이다. 이들의 이런 필요를 자극하면 대화에 유리했다. 공동 산학 연구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면 교수들은 반색하며 다양한 의견들을 나줘줬다.
기술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 내가 또 한 일은 빅테크 기업 연구자들, 개발자들, 해외 대학 교수들의 SNS를 지속적으로 추적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커리어 브랜딩을 위해 트위터나 링크드인과 같이 슬롯 관계망을 적극 활용하곤 한다. 물론 이들은 SNS를 할 때 'Opinions are my own(여기 올리는 의견들은 개인적인 견해임)'과 같은 면바카라 조항을 달고, 회사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개인 사견임을 명시한다. 따라서 이들이 소속 기관의 전략이나 계획은 알 수 없지만, 이들의 포스팅을 통해서 업계에서의 큰 기술 흐름 정도는 읽어볼 수 있다.
경쟁사의 현재 기술을 분석하는 것도 필요하다. 미래를 예측하려면 우선 현재부터 확실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기술에 대한 정보를 추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공개된 자료가 많기 때문이다. 회사들은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제품 사양 스펙, 백서, 매뉴얼, 홍보용 기사 등을 공개한다. 또한 신제품이 출시되면 곧 전문 리뷰 사이트들에 분석 기사들도 올라온다. 개인적으로 리뷰를 하는 해외 IT 블로거들의 글도 참고가 된다.
이렇게 출장지에서 취재해 온 정보와 취합해 온 자료를 분석한 결과, 내가 해온 연구 분야에 새로운 미래 기술 하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계에 발표되는 논문을 통해 미국 반도체 빅테크 두 회사에서 이 기술에 대해 공격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기술은 기존의 방법보다 훨씬 좋은 품질의 결과를 출력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이론 자체는 이미 70년대 후반에 제시되어 특별할 것은 없었다. 알고리즘 자체가 워낙 방대한 계산을 필요로 해 오랫동안 상용화되지 못한 기술이었다.
반도체 성능이 해마다 빠르게 발전하면서 빅테크 연구자들이나 학계에서 해당 기술을 연구에 적용해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학계는 그 가능성을 논문을 통해 발표했고, 빅테크 연구자들은 자사의 기존 반도체에서 실험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간단한 테스트에 대해서는 실시간 처리가 가능했지만, 아직 상용화에 이르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또한 오랜 기간 동안 반도체가 다른 기술을 기반으로 계속 발전해 왔기 때문에, 이 기술의 상용화를 위해서는 결국 기존 반도체의 본격적인 재설계가 필요했다.
경쟁사들에서 최근 몇 년간 해당 기술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해 왔지만, 그들에게서 상용화에 필요한 반도체 즉 하드웨어 재설계에 대한 움직임은 관측되지 않았다. 나는 이들이 시장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 기술의 파급력, 그리고 당시 학계의 연구 트렌드를 보았을 때, 시기의 문제일 뿐 결국 해당 기술이 가까운 미래에 시장을 지배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경쟁사들은 빠르게 반도체 재설계에 착수해 상용화에 나설 것으로 본 것이다.
나는 그 시기를 점치기 시작했다. 두 빅테크 업체가 현재 가진 반도체의 최대 성능 수치와, 해당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필요한 성능 요구 수치를 계산했다. 그리고, 이들이 반도체 재설계를 통해 해마다 개선할 수 있는 예상 수치의 누적을 통해, 그 간극을 매울 수 있을 때까지의 필요 시간을 도출해 냈다. 그 결과 대략 4-5년 후면 이들이 자사 반도체에 해당 기술을 탑재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후부터는 이 기술이 왜 당사에 필요한지 논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해당 기술이 아직 시장에 나오기 전이라 컨슈머 리포트와 같은 공식적인 시장 전망 자료는 전무했다. 최대한의 추론 능력을 동원해 적용될 응용 분야들을 상정하고, 예상되는 시장 규모, 당사에 가져다 줄 매출 등을 산정했다. 이를 다양한 그래프와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렇게 학계의 연구 추세, 분석한 경쟁사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준비했던 근거들을 모두 포함해, 왜 우리가 4-5년 내 상용화를 목표로, 해당 기술에 대한 연구 개발을 지금 착수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안서를 만들었고, 이를 출장 보고 발표 자료에 삽입한 것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체계적으로 준비한 끝에, 내 발표를 들었던 그룹장의 재가가 떨어졌고, 소속한 팀 내에서 새로운 파일럿 연구과제가 착수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내가 준비했던 일련의 과정은 한마디로 말해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기획자'가 아닌 평범한 연구원이었을 뿐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하기 위해 준비했던 일이 자연스럽게 '기획자'가 하는 업무가 된 것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제안'이었을 뿐 정식 과제 기획은 아니었기에, 프로젝트 범위, 목표 설정, 로드맵, 연구 개발 계획, 필요 연구 인력과 스케줄 등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후 정식으로 과제 착수가 승인되었을 때, 실행 계획을 보강해 더 구체적인 기획 과정을 진행했다.
통상 한국의 대기업의 연구소나, 사업부에는 전업 기획자들이 따로 존재한다. 그들은 중장기 연구 전략을 짜거나, 상품과 제품을 기획하는 별도의 전략, 기획 부서에서 일을 한다. 하지만, 엔지니어나 연구원들도 본인이 궁극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기 미래 기술을 전망하는 최소한의 기획 능력이 있어야 한다. 리더가 되면 현재를 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를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리자로서 그 보직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점차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일이 자신의 중요한 본업이 된다.
이 '기획력'은 짧은 기간 동안 습득되지 않는다. 특히 그 주기가 짧고, 트렌드가 자주 변하는 기술 분야에 대해서는 그만큼 미래를 전망하기가 더 어렵다. 평소부터 학계, 업계 기술 동향과 트렌드를 민감하게 관찰하고, 과거 데이터를 축적해 그 흐름을 추적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미래 기술'이라는 것은 데이터 자체가 없기 때문에, 현재 데이터를 기반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추론 능력도 필요하다. 이는 해당 분야의 실무 지식을 바탕으로, 연역적으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고도의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내가 경쟁사가 특정 기술을 출시할 시점을 추론했던 과정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경쟁사가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개선된 성능 향상 비율은 '과거 데이터', 경쟁사 제품 설명서를 통해 습득한 성능 수치는 '현재 데이터', 향후 미래의 응용이 원활히 서비스되기 위한 필요한 최소 성능 요구량 등은 '미래를 산정해 계산한 현재 데이터'다. 특히 '미래를 산정한 현재 데이터'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미래 시점을 예상한 파라미터를 적용해 계산하거나 필요시 실험을 통해 도출해야 한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 데이터를 조합해 최대한 미래 시점을 예측해 내는 것이다. 이외에도 '추론'은 현재 및 미래의 시장 전망에 대한 다양한 정성적, 정량적인 분석을 통해 이뤄진다.
따라서 이런 기술 과제를 기획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해당 분야의 심도깊은 기술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전략 부서의 인력들이 중장기 기술 전략을 짤 때 실무자들과 협업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뒤늦게 자신의 적성을 발견한 실무자 출신들이 기획과 전략부서로 변신을 하곤 한다. 실무 경험이 기획 업무를 수행할 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만의 아이디어, 프로젝트를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은 실리콘 밸리 빅테크의 실무 엔지니어들에게 더욱 두드러진다. 향후 엔지니어링 매니저로 경력을 전향하고자 하는 실무 엔지니어들은 별도로 MBA과정을 밟곤 한다. MBA가 이력서에 한 줄 더 추가할 수 있는 일종의 '자격증'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마케팅, 인사, 재무, 전략, 기획 등 경영 전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향후 자신의 커리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단 엔지니어링 매니저가 아니어도 실무 엔지니어들에게 기획 능력이 있다면 더욱 많은 경력 성장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발언이 자유로운 수평적인 조직문화에서는 실무자 누구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실무자 시절부터 자신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할 기회가 많은 것이다. 기획안이 혁신적이고 획기적일수록 협업자들을 쉽게 모으고, 사이드 팀을 꾸려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구글의 80/20 문화다. 즉 자신의 정규 근무시간의 80%는 주어진 업무에, 20%은 자유롭게 창의적인 프로젝트에 할애하는 것인데, 20의 시간을 이용해 자유롭게 창의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이를 발전시켜 상용화에 나설 수 있다. Gmail, 애드센스, Google Talk 등 구글을 대표하는 이러한 서비스들이 모두 이러한 과정을 통해 출시되었다.
무엇보다도 실리콘 밸리는 벤처 기업의 성지다. 빅테크 기업에서 근무하던 실무 엔지니어들이 퇴사해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갖고 창업해 성공(물론 그만큼 더 많은 실패)하는 일들이 쉽게 벌어지는 곳이다. 투자자들을 설득해 투자를 받기 위해 창업자에게 필요한 능력은 당연히 '기획력'이다. 스타트업에 성공한 구글 출신의 엔지니어가 많은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이미 80/20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실무자 시절부터 스스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왜' 자신의 아이디어가 미래를 바꿀 것인지 남들을 설득하는데 충분한 경험을 쌓았기에, 스타트업 창업 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기획은 결국 '왜?'라는 질문에 맞는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왜' 이 기술이 미래에 유망한 지, '왜' 경쟁사는 지금까지 안 하고 있었는지, '왜' 이 기술이 아니면 안 되는지, '왜' 당사가 이 기술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들을, 존재하거나 추론된 데이터 그리고 논리들을 통해 도출해 내는 것이다. 기획은 실무 팀들이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연구소나 사업부의 중장기 연구와 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것, 나아가 회사의 미래 방향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일까지 이어진다. 그 크고 작은 일련의 기획 과정에서 엔지니어는 기획자가 되어,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 의사 결정권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엔지니어가 실무자 시절부터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지금 하는 연구 개발이 '왜' 필요한 일인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방법이 '왜' 최선인지, 경쟁사는 '왜' 새로운 기술을 출시했는지 고민하고 그 대답을 찾아내는 습관을 미리부터 길러야 리더가 되었을 때 필요한 기획력을 자연스럽게 발휘할 수 있다. 엔지니어는 기획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술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는 리더가 되려면 실무자 시절부터 조금씩 기획 능력을 갖춰야 한다. 실무 능력뿐만 아니라 '기획력'까지 갖춘 엔지니어가 성장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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