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다 엮여있는 역량
S사에 근무중일 때의 일이다. 미국 법인에 출장을 다녀온 동료 A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A는 현지 법인에서 업무의 진척 사항을 파악하고자 실무자 미팅에 참석했다고 했다. 해당 미팅은 중요한 설계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였다.
현지 엔지니어들 간 토론이 시작되었는데 여러 의견이 오가던 중 분위기가 점차 과열되기 시작했다. 두 명의 미국 엔지니어 B와 C 간에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둘 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급기야 욕만 안 했지 싸움에 가까운 큰 고성이 오갔다. 두 엔지니어의 모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A는 급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결론 내리는 것을 잠시 미루자고 제안하며 분위기를 가라앉힌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이다음에 벌어졌다. 곧바로 점심시간이 되어 미팅을 마쳤는데, B와 C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벼운 잡답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행과 함께 식당으로 향하는 B와 C는 농담까지 나누며 킬킬대기까지 했다. A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좀 전까지 싸움에 가까운 논쟁을 벌이던 사람들이 맞나 싶어서 말이다.
미국 테크회사에서 미팅 중 의견이 충돌하는 일은 흔하게 벌어진다. 물론 이처럼 회의 분위기가 어색해질 정도로 고성이 오가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전에 어떻게든 합의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 정도가 심하긴 했지만, B와 C는 미국 현지 엔지니어의 '전형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좋게 말하면 '바카라임감이 강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너무 세다'는 것. 그 정도가 심했던 둘이 만난 것뿐이다.
그런데 B와 C가 회의에서 격론을 펼치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식사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순수하게 '기술적인 내용'으로만 싸웠기 때문이다. 만일 이들이 설전에 '인신공격'이나 '조롱'을 섞었다면 당연히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고소각'. 이렇듯 미국에서 엔지니어가 논쟁을 벌일 때는 실무로만 붙는다. B와 C는 서로 나이, 경력, 직급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이런 '계급장'은 미국 테크회사 회의석상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엔지니어'로서 똑같은 입장이고 토론자일 뿐이다.
미국에서 실무 엔지니어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도와 분야는 다르지만 각자만의 경험과 지식이 있기 때문에, 모두 마음속에 자신만의 '칼'을 품고 산다. 경력자들은 여러 회사를 거치며 다양한 제품, 서비스를 설계하고 개발한 경험을 보유하고, 하다못해 신입이라 할지라도 최소 3~6개월의 업계 인턴 경험을 쌓고 입사한다.
게다가 이들 모두 쉽지 않은 채용 과정을 뚫어 '전문성'을 입증한 엔지니어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만큼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엔지니어들 간에 서로 주고받는 영향력은 경력, 나이, 직급이 아니라 각자의 '전문성'에서 나온다. 경험 많은 시니어 엔지니어라도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주니어의 의견에 경청하고 기꺼이 그들에게서 배운다. 주니어 엔지니어라 해도 그 전문성이 뛰어나면 얼마든지 조직 내에서 영향력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평적인 조직 문화에서 위계에 의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벌어질 수 없다. 하급자에게는 정보를 제한하거나 '까라면 까세요'라는 식의 비논리적인 권력 행사가 발붙이기 힘든 조직 문화이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매니저와, 기술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테크 리드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어서(경우에 따라서는 겸직을 하기도 한다) '평가권'을 무기로 팀원을 굴복시킬 수도 없다. 평가권이 있는 매니저는 엔지니어의 결과물로만 평가해 고과를 주고, 테크 리드는 자신의 뛰어난 '전문성'만으로 팀을 리딩한다.
이러한 환경의 엔지니어에게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바로 '논리적 말하기'에 있다. 앞에서 말했듯 역할 조직에서의 엔지니어 간 대화는 기술적 정합성, 논리, 근거 외에 그 어느 것도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과 정보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의견을 합리적 근거와 함께 피력하는 것만이 유일한 의사소통 방식이다. 팀원을 설득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데는 엄혹한 위계도, 뜨거운 감정도 아닌 차가운 이성뿐인 것이다.
물론 엔지니어에게 의사소통은 그 직군에 따라 훨씬 다방면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다른 분야 엔지니어들, 비엔지니어들, 고객과도 소통해야 한다. 그래서 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상대방의 생각과 언어(배경, 용어)를 이해하고 공감할 줄 아는 마인드셋을 갖춰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팀원 간 업무 조율, 경영진과의 소통까지 이어지므로 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다각도로 중요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커뮤니케이션도 결국 논리적 말하기에서 출발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들의 언어로 말하기 위해서도, 우선 자신만의 논리 구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리콘 밸리 빅테크 기업에서 실무 엔지니어들이 가장 많이 소통하는 것은 팀원, 유관부터 엔지니어 그리고 자신의 매니저다. 비엔지니어 고객을 상대하는 일은 마케팅 엔지니어(Marketing Engineer)나 프러덕트 매니저(Product Manager)가 전담하고, 엔지니어 고객을 상대하는 일은 데브텍(DevTech)이나, 필드 애플리케이션 엔지니어(Field Application Engineer)가 전담하기 때문이다.
한국같이 '기획자'라는 직군이 있는 것도 아니라 개발자들이 비엔지니어들과 수시로 소통해야 하는 일도 없다. 따라서 통상의 개발팀 실무 엔지니어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은 같은 배경의, 같은 엔지니어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주로 벌어지게 된다. 이러한 소통에서는 결국 순수하게 '논리'만이 힘을 발휘한다.
엔지니어가 논리적인 말하기를 할 수 있으려면, 우선 논리적인 쓰기를 단련해야 한다. 논리적인 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력이 필요하고, 이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글을 많이 읽는 수밖에 대안이 없다. 앞 글들에서 읽기, 쓰기, 생각하기를 누누이 강조한 이유다.
글로벌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필요 역량은 그렇게 씨줄 날줄처럼 엮여있다. 사고력이 곧 커뮤니케이션이고, 커뮤니케이션은 곧 자기 홍보다. 자기 홍보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면 그것이 결국 기술 리더십이 된다.
바로 그 기술 리더십에 대해서 다음 주에 다루도록 하겠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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