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에 충실할 것
엔지니어에게 실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글쓰기다. 그런데 많은 엔지니어들이 그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심지어 귀찮아한다. 실무 처리하기도 바쁜데 글쓰기에 쏟을 여력 따윈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고민 없이 하기 싫은 숙제 대하듯 글을 쓴다. 보상이 없다 생각해 동기부여도 안된다.
하지만 엔지니어의 문서는 생각보다 무거운 글이다. 글을 쓰는 엔지니어는 일반 작가와는 다르다. 작가는 글을 출판해 판매하지만, 독자는 작가의 글이 싫으면 안사면 그만이다. 하지만 엔지니어에게는 글을 소비하는 고객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고품질의 텍스트를 생산해야 할 바카라임이 있다. 심지어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엔지니어의 글쓰기에 대한 보상은 '돈'과 같이 즉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평판'이다. 여기서 핵심은 '고객'에 있다. 외부 고객사든, 최종 소비자든, 사내 상사나 팀 동료든 글로 그 '고객'을 만족시킬 때 자연스럽게 좋은 평판이 따라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쌓인 이 평판은 고과, 승진, 추천, 이직 시 소개 등 후에 큰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엔지니어는 고객뿐 아니라 커리어를 위해서도 좋은 글쓰기를 해야 한다.
엔지니어 글쓰기의 본질과 원칙에 대해서는 앞의 글에서 살펴봤다. '설득과 전달'을 위한 엔지니어의 글은 주제가 분명하고, 근거가 뒤따라야 하며, 객관적이며 구체적인 문장으로, 두괄식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오늘부터는 몇회에 걸쳐 엔지니어가 쓰는 문서의 종류와 각각에 대한 글쓰기 방법을 알아보려 한다. 그런데 시중에 이미 '보고서 작성법', '효과적인 발표법' 등의 실무자를 위한 글쓰기 서적들이 즐비하다. 본 시리즈에서는 그 정도의 복잡한 방법론을 다루지 않으며 문서별로 핵심 포인트만 짚을 것이다.
엔지니어는 업무상 여러 종류의 글을 쓰는데, 이번 시리즈에서는 대표적인 다섯 가지 문서(보고서, 발표자료, 스펙, 논문, 특허)를 다룬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엔지니어의 보고서 쓰는 법을 알아볼 것이다. 문서에 따라서는 한국과 미국회사에서의 글쓰기 요령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이 경우 각각의 차이점을 말미에 첨부할 것이다.
보고서는 업무상 가장 흔히 쓰게 되는 문서다. 한국 회사와 같은 위계 조직에서는 '보고 문화'가 일상이다. 따라서 발표나 구두 보고만큼이나 문서는 보고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보고서는 통상 일, 업무를 진행했을 때 그 진척사항을 요약 정리해 고객에게 알리기 위해 쓴다. 주간, 월간, 분기 등 주기별로 쓰기도 하며, 프로젝트 중간, 완료 등 특정 시점에 쓰기도 한다.
그중 가장 자주 쓰는 문서는 주간 보고서다. 말 그대로 매주 한 번씩 쓰기 때문이다. 회사마다 양식이 다르긴 하지만 통상 주간 보고서에는 금주 진행 업무를 요약 정리하고 차주 계획을 간략히 덧붙이게 된다. 보고서는 '전달'을 위한 글이지만, 단순히 사실을 나열해서는 곤란하다. 여기 두 가지 핵심 포인트가 있다.
핵심은 보고서를 소비할 1차 고객의 입장을 철저히 고려하는 것이다. 고객은 대개 피보고자인 상사다. 그런데 상사는 당신의 보고서를 단순히 소비만 하지 않는다. 다른 구성원의 보고서들과 함께 취합, 재생산후 2차 상사에게 또다시 보고 하게 된다. 이렇게 조직의 계층을 타고 올라가면서 보고서의 내용은 단계별로 축약된다.
실무진에서 쓴 보고서는 몇 단계를 거쳐 임원에게 도달한다. 그 내용이 조직 내 중요도가 높다면 임원 보고서에까지 살아남고, 그렇지 않다면 관리자들이 내용을 추상화(Abstraction)하는 과정에서 모두 생략된다. 추상화 과정에서 디테일은 압축되는 반면 '의미'가 추가된다. 그리고 임원 보고서에는 총괄 요약(Executive Summary)과 '최종 의미'가 담기게 된다. 임원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무 엔지니어가 보고서를 쓸 때는 내 1차 고객이 2차 고객에서 보고하기 용이하도록 작성해야 한다. 내 상사가 자신의 보고서를 쓸 때 편집 없이 내 보고서를 그대로 '복붙'할 수 있다면 성공이다. 여기서 핵심은 요약(Summary) 및 강조(Highlight)에 있다. 고객이 내 보고서를 요약하는 과정까지 담고, 그가 놓칠 수도 있는 강조점을 짚어주는 것이다.
그 방법은 실무단계에서 나만의 '총괄 요약'을 서두에 기술하는 것이다. 일단 자신이 금주동안 진행한 내용을 중요도 순으로 나열하는데, 만일 수치로 도출된 결과(예. ~대비 14% 향상)가 있으면 첨부한다. 1차 정리가 완료되었으면 다음으로 요약 및 강조작업을 진행한다. 이때 버릴 것은 버리고 살릴 것은 살린다.
살아남는 항목들은 간명하지만 그 내용은 모두 내포할 수 있도록 추상화시켜 기술한다 (이것이 마법이다!). 숫자를 포함한 중요한 지점은 눈에 띄게 강조한다. 그리고, 아울러 내 결과물이 조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담을 수 있다면 함께 추가하면 좋다. 보고서 요약, 편집은 1차 상사가 해야 할 일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보고서를 쓰는 이유는 단순 '고객 만족'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목적은 바로 조직 내에서 내 업무의 가시성을 높이는 것이다. 최종 목표는 실무자인 내 일의 결과가 의사 결정권자의 바카라상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단계를 거치면서 생략될 수도 있다. 하지만 최대한 높은 단계까지 살아남아야 내 업무, 나아가 나라는 존재가 조직에서 부각될 수 있다. 그 1차적인 길은 내가 쓰는 보고서에서 내 업적을 스스로 강조하는 것이다. 내 상사가 해야 할 편집 수고를 덜어줘 인정받는 것은 부차적이다.
엔지니어가 보고서를 쓰면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일관성이다. 보고서는 주기별로 쓰기 때문에 매주, 매월 기록으로 남는다. 주기별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1차 고객과 나와는 컨텍스트(Context), 즉 맥락이 생긴다. 상사는 보고서를 통해 팀원 업무들의 진행사항, 애로점, 요구사항, 단기 계획 등을 파악한다. 이것이 시간을 걸쳐 쌓아온 두 개인 간의 맥락이다. 그리고, 상사는 또 다른 팀원 및 자신의 상사와도 맥락을 쌓는다. 그래서 조직은 거대한 맥락들로 구성된 네트워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보고서에서 한번 맥락이 어긋나면 이 네트워크에 균열이 생긴다. 이는 개인 심하면 조직의 신뢰도에 영향을 끼친다. 정보의 흐름이 차단되고 일정 차질까지 빚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맥락을 단절시키는 흔한 실수는 바로 보고서에서 항목을 누락시키는 일이다. 지난주에는 있던 항목이 금주에 사라졌거나, 지난주에 차주계획이라며 밝힌 항목에 대해 금주엔 전혀 언급이 없다면, 1차 고객과 나와의 맥락은 바로 끊어진다.
물론 엔지니어는 여러 업무를 동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 업무에 대해서는 진행사항이 없을 수 있다. 우선순위가 떨어지거나, 더 급한 업무를 하느라, 종속성이 발생하는 등의 이유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이유와 함께 'No Progress/Update, 보류 중'과 같이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 반대로 새롭게 추가된 업무, 프로젝트가 있다면 'New Project, 신규 업무'와 같이 말머리를 달아 고객에게 바르게 인지시켜줘야 한다.
'계획'과 '실행'과의 맥락 관계는 더 중요하다. 엔지니어가 보고서에 일단 계획을 기입하면, 1차 고객은 차주에 그 일이 실행될 것이라 예상한다. 다른 팀원의 계획들과 정합하여 나름대로의 주간 팀 계획을 수립하고 자신의 보고서에도 기술한다. 그런데 계획되었던 항목이, 그 실행여부를 떠나, 보고서에서 내용 자체가 누락되면, 팀원의 보고를 믿고 일처리를 한 상사를 기만하게 되는 것이다.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행사항이 없어도 그 이유와 함께 현재 상태를 가감 없이 남겨야 한다.
보고서에 항목을 누락시키는 원인은 1) 기억력에 의존해 금주에 진행한 내용만 담거나, 2) 진행사항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부담감이 있어서다. 하지만 고객의 기억력은 흐릿할지 몰라도, 보고서에 남은 '기록'은 뚜렷하다. 어떤 경우든 이렇게 보고서를 작성하면, 반드시 지적이 들어오게 된다. 이는 고객의 시간을 불필요하게 소모시키는 것이다. 단절된 맥락을 다시 잇는 과정이 반복되면 보고자의 평판은 나빠진다. 따라서 보고서를 쓸 때는 시간에 따라 반드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미국 회사와 같은 '역할 조직'의 경우, 이런 보고 문화가 상대적으로 덜 정형화되어 있다. 형식화된 보고서 문화는 없거나, 있다 해도 그 주기가 상대적으로 길다(월간, 분기). 대신 우리의 주간 회의와 같은 스탠드업 미팅(Standup meeting)을 통해 매니저, 팀원들은 업무 진행사항을 공유한다. 개인별로 1~2분간 간략히 구술하고 가벼운 질답이 오가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는 매니저가 팀 내 업무 진척사항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따라서 매니저는 팀원 개개인과 별도의 1:1 미팅을 매주 진행한다. 따라서 보고를 위한 문서보다는 구술로 정보가 흐르게 된다 (그렇다고 문서작업이 없는 것이 아니다. '보고서'만 없는 것이지, 실무자들은 메일, 스펙, 매뉴얼, 계획, 스케줄 등 정보 공유를 위해 온라인으로 다양한 문서를 쓴다).
위에서 기술한 보고서 작성 요령은 매니저와 1:1 미팅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단순히 내가 한 일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 매주 진행상황을 일관성을 있게, 매니저 입장에서 생각해 구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스스로 매주 안건을 간략히 메모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보고서는 경영진부터 실무진까지 전 직원이 쓰는 유일한 문서라 할 수 있다. 비단 엔지니어뿐 아니라 모든 온라인 게임인들이 쓰는 가장 기초적인 문서다. 온라인 게임인 글쓰기의 기본인 '보고서'부터 원칙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어야, 발표자료, 논문, 특허, 스펙 등 더 복잡하고 다양한 문서들까지 바르게 쓸 수 있다. 철저히 고객 입장을 고려하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보고서 작성은 글로벌 일잘러 엔지니어로 나아가는 데 있어 주춧돌이 되어 준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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