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에서 이직은 언제, 왜 하는가?

실리콘 밸리와 한국의 이직 문화

by예나빠


얼마 전 팀 동료 한 명이 경쟁사로 이직을 했다. 스탠퍼드 석사를 마치고 인턴을 거쳐 11년간 일하며 정들었던 이 회사를 떠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선 것이다. 한 회사에서 11년이면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는 엔지니어 치고 근속 연수가 꽤 긴 셈이다. 그만큼 회사나 자신의 일에 만족도가 높았다는 뜻일 것이다. 워낙 유능했던 그 친구는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연구 업적을 여러 차례 상용화시켰고, 연구팀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테크 리드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다. 다른 이의 연봉 정보는 알 수 없으니 정확한 액수까지는 모르지만, 짐작컨대 좋은 대우도 받아왔을 것이 분명하다.


매니저를 통해 그의 이직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드디어 때가 왔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의 학계나 업계에서 인지도를 생각해보면 언제 이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명히 그동안 타사로부터 많은 기회를 제안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내의 많은 이들도 그의 이직에 대해 'Big Loss'라며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대부분 이를 수긍하고 그의 새로운 출발에 대해 축하해주곤 했다.


그가 회사에 출근하는 마지막 날, 매니저는 온라인으로 환송회를 개최했다. 팀원을 포함하여 그 친구를 아는 사내의 모든 엔지니어들이 초대되었는데, 사내 네트워크도 무척 넓었기에 참석자만 50여 명 가까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아쉽다", "새로운 곳에서도 잘되길 바란다", "너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고맙다"라며 그 친구에게 감사, 축하,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들도 모두가 웃으며 덕담을 나누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들은 왜, 언제 이직을 하는가


미국에 온 지 5년 차에 접어든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상당히 많은 이직자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애플, AMD, NVIDIA와 같은 동종 반도체 업계,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빅 테크 S/W 기업, 미디어텍, 로블록스와 같은 중소형 회사들과 같이 다양한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들 중 나보다 먼저 이 회사에 입사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나보다 늦게 입사한 친구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의 빈자리는 같은 업계로부터 온 새로운 이직자들, 대학원을 졸업한 신규 박사들, 인턴들로 채워졌다. 평균 근속 연수가 3년이 채 안 되는 실리콘 밸리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리콘 밸리(뿐만 아니라 미국의 모든) 회사에 입사가 확정되면 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되는데, 이 계약서에는 아주 유명한 문구가 존재한다. 바로 'At-will'이다. 직역하면 '마음대로'쯤 되겠는데, 고용주는 불법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어떤 이유로든 법적 바카라임 없이 직원을 해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회사가 임의로 직원을 해고시킬 수 없도록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한국의 근로환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무시무시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능력 있는 개인들에게는 그만큼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이기도 하다. 직원은 불리한 법적 결과 없이 이유를 불문하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온라인 게임을 떠날 수 있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들은 좋은 기회가 찾아오면 아무런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난다. 그리고, 발 빠른 친구들은 그 기회가 찾아왔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를 잘해둔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여러 기술이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능력을 키워간다. 또한 프로젝트의 성과가 타사에서도 높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이력을 관리한다. 한국 회사라면 자신의 경력을 위해 일하는 이런 직원들의 태도가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직원들이 그만큼 동기 부여를 확실하게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실리콘 밸리는 이러한 노동 유연성을 철저하게 고수한다. 직원이 스스로 일하고 싶은 욕구가 넘쳐날 때 조직의 생산성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들은 언제, 어떤 이유로 회사를 떠나게 되는 것일까? 미국 온라인 게임 평가 사이트 글래스도어(glassdoor)는 실리콘 밸리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1400명을 대상으로 설문(복수 응답 가능)을 실시한 뒤, 이직의 이유로 다섯 가지를 꼽았다. 가장 많았던 응답은 뭐니 뭐니 해도 연봉과 보상(78%)이었다. 딱히 기업 문화나 근무 환경에 불만이 없어도, 더 좋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면 이직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다음 이직 사유로는 경력 성장의 기회(76%)가 꼽혔다. 통상 신입으로 입사해 몇 년을 보내다 보면 일에 익숙해져 정체되는 느낌에 빠지게 된다. 새로운 성장을 위한 돌파구로 이직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력 성장도 결국은 더 나은 연봉과 보상에 대한 기대심리에 따른 것이므로 첫 번째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이직 사유로 업무형태(58%), 기업문화(53%), 위치 및 출퇴근(41%) 등이 뒤따랐다.


소수의견으로 매니저나 동료와의 관계, 회사의 평판, 일의 양 등의 이유들도 있었지만, 이직을 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결국 그들이 이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의 회사들은 뛰어난 인재에 언제나 목마르다. HR 직원들은 링크드인(linked-in)과 같은 개인 이력 사이트를 통해 능력 있는 경쟁사 인력들을 주시하고 수시로 연락해 이직 의사를 묻곤 한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에서 근무하다 보면 타사 HR에서 참 많은 연락을 받는다. '당신의 훌륭한 이력이 마음에 든다. 당신에게 맞는 멋진 일이 우리에게 있다. 한번 지원해 보겠는가?' 타사 HR 직원의 칭찬이 입에 발린 아부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최소 10-30% 연봉 상승이 기대되는 새롭고 흥미로운 도전 기회가 찾아온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회사를 떠난다고 할 때 딱히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 회사에서 머물던 기간이 지나치게 짧은(예. 1년 미만) 경우가 아니라면, 이직이 잦다고 한국처럼 '조직 부적응자 아니야?'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에서 흔히 쓰는 잡 호핑(jop hopping)이라는 말도 그다지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잘 해내는 인력을 능력자로 인식한다. 이직이 자신의 가치를 능동적으로 끌어올리는 가장 가시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도 새로운 기회에 대해 항상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의 연차가 쌓이다 보니 어느샌가 나도 이들의 문화에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이직 문화


한국의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적지 않은 동료들이 회사를 떠나는 것을 본 것 같다. 전 온라인 게임에서 11년간을 근무했으니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겪을 기회가 꽤 많았다. 동종 업계 이직 방지 조항에 따라 같은 분야 경쟁사로 바로 이직하는 경우는 그다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공을 조금 바꿔 타 분야 대기업이나 국내 외국계 회사로 이직하는 경우도 많았고, 일부는 스타트업에 좋은 조건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다시 학계로 돌아가 교수로 임용되는 경우도 꽤 있었고, 일부는 유학을 떠났으며, 의학 전문 대학원이나 로스쿨 등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직업을 시작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전 온라인 게임을 퇴사하기 직전까지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등 해외 기업으로 직접 이직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보곤 했다. 더 이상 한국의 인력들을 한국에만 붙잡아 둘 방법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능력만 있다면 점차 해외로도 이직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지고 있다. 실리콘 밸리 다양한 장소에서 전 온라인 게임 동료를 만나 반갑게 인사하는 일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 간다.


나를 포함한 이들이 국내 최고라 하는 대기업을 떠났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려운 취업난을 뚫고 대기업에 입사가 확정되면서 모두가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아들, 딸들이 된다. 하지만, 회사를 계속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이직, 아니 퇴사를 고민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의지가 하늘을 찌르던 신입시절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매사 적극적으로 업무에 자원하고, 자발적으로 야근을 불사하지만 이런 의지는 점차 사그라든다. 몇 번의 조직 개편을 겪고 자신의 의지로는 제어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트리며, 그 뜨거웠던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취업 자체가 힘겨운 목적이 되지만, 막상 어렵사리 입사한 곳에서 더 이상 버틸 이유를 잃어버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되어 버리고 만다.


현재 회사에서 자신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다른 기회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직 시장이 활성화되어있는 신입, 대리, 과장급 인력들은 시도할만한 또 다른 기회가 있다. 하지만, 이미 그 기회를 놓쳐버린 나이 든 부장급 인력들은 뒤늦게 현실 자각 시간을 맞아도, 딱히 뾰족한 대안이 없기에 비자발적인 '버티기 모드'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월급만이 출근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버리고, 풍파에도 쓸려나가지 않으려는 젖은 낙엽 같은 삶을 살아낸다. 후배들이 회사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릴 수 없는 것은 이런 선배들의 뒷모습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행에 옮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이직을 꿈꾼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서점가를 강타한 자기 개발서의 화두가 바로 '퇴사'였던 것이 괜한 이유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누군가 퇴사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였다. '일이 많이 힘들었나?', '상사가 많이 힘들게 했나?'라는 궁금증이 들었고 이가 해소되면 비로소 "퇴사하고 뭐한데? 어디 좋은 데 가는 거야?"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이 퇴사자의 퇴사 이유를 가장 신경 쓰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HR 담당자들이었다. 직원이 퇴사 의사를 밝히면 HR 부서와 지루한 면담이 시작된다. 직원을 붙잡기 위해 마지막으로 노력하는 셈인데, 회사도 한번 마음 떠난 사람을 잡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직원의 퇴사의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야 조직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면담을 마친 퇴사자는 '내가 회사 다닐 때 이 정도 관심을 보여주었으면 좋았으련만'하고 씁쓸함을 다신다.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올해 실시한 이직 사유에 대한 설문에서 다소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온라인 게임인들이 이직을 하는 이유로 10년 전에는 '연봉'이 가장 컸지만, 현재는 많은 이들이 '복리후생 및 근무환경'을 더 중요시한다고 한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돈을 조금 덜 받더라도, 근무 여건이 좋고 워라밸을 추구할 수 있는 곳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개발자나 엔지니어들이 실리콘 밸리로의 이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는 것도 이런 맥락에 기인한다. 조직을 위해 개인이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경력만을 위해 일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선택지가 넓어 능력만 있으면 연차와 상관없이 언제든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이 가능한 환경이 그들을 자극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11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마지막 출근을 하던 날, 직속상관이었던 임원은 내가 퇴사하게 되었다며 환송회를 공지하는 그룹 전체 메일을 보냈다. 그 임원은 자신이 작성한 메일에 내가 했던 일이 회사에 큰 기여였다며 과분한 칭찬을 담아 주었다. 누군가 회사를 떠나면 아무래도 조직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의 온라인 게임 문화에서 퇴사자를 기쁘게 보내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임원의 배려 덕분에 나는 해묵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새로운 경력의 한 장(章)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써내려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챕터를 마무리할 때쯤이면 또 다른 '이직의 이유'를 발견할지 모른다. 고국에 있는 많은 분들도 모쪼록 여러분만의 이유를 찾아 성공적인 경력 성장을 일궈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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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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