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이끌림의 인문학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오랫동안 고전문헌을 가르쳐온 사람이다. 그는 오래된 언어와 문장을 읽고 해석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왔고, 정해진 시간에 학교로 가서 학생들을 가르친 뒤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의 삶은 안정되어 있고 지적인 질서를 갖추고 있지만, 그 안정이 오래 지속된 만큼 새로운 사건이 들어올 자리는 거의 없어 보인다.
수많은 문장을 읽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왔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지 못한 채 살아온 셈이다.
그런 그의 일상에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건이 들어온다.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포르투갈어로 쓰인 바카라, 그리고 그 바카라을 쓴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낯선 인물이 지금까지 아무 관련도 없었던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그의 삶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왜 그 바카라에 그렇게 강하게 끌리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리스본에 꼭 가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삶을 바꾸겠다는 오랜 결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몇 개의 문장을 읽은 뒤 그는 평생 반복해 온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 열차에 오른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변화가 거대한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것도 아니며, 오래 준비한 목표를 실행한 것도 아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바카라과 몇 문장이 익숙한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고, 그 균열 사이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가능성이 들어왔을 뿐이다.
인간의 삶은 때때로 이런 방식으로 움직인다.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결심이나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우연히 읽은 한 문장과 처음 들은 음악, 낯선 사람과의 짧은 대화, 이전에는 맡아보지 못했던 향처럼 아주 작은 경험이 자신도 몰랐던 방향으로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커피와의 깊은 만남도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커피는 처음부터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아침에 잠을 깨기 위해 마시거나, 일을 하면서 습관적으로 마시고, 누군가를 만날 때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음료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커피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쓴맛과 향, 따뜻함 정도로 이해했던 음료가 매일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면 그것이 어디에서 왔고 왜 이런 맛을 가지는지 굳이 생각할 이유도 없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이 알던 커피와 전혀 다른 한 잔을 만날 수 있다.
잔에서 꽃을 떠올리게 하는 향이 올라오거나, 익숙했던 쓴맛 대신 선명한 과일의 산미와 부드러운 단맛이 이어질 수도 있다. 분명 커피인데 지금까지 커피라고 알고 있던 감각과 잘 맞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면, 익숙했던 맛의 질서에 작은 틈이 생긴다.
그때 사람은 설명보다 먼저 반응한다.
이게 정말 커피인가, 왜 이런 향이 나는가, 무엇이 이 커피를 다르게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이 뒤따르지만, 그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은 놀라움과 호기심이다.
나는 이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반드시 충분히 이해한 뒤에만 무엇인가에 끌리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중요한 많은 경험에서 이끌림이 지식보다 먼저 도착하고, 지식은 자신이 왜 그것에 끌렸는지를 나중에 설명하기 위해 따라오는 경우가 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아마데우의 생애와 포르투갈의 역사를 충분히 알고 리스본으로 떠난 것이 아니다.
먼저 문장에 끌렸고, 그 이끌림을 설명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
커피에서도 감각이 먼저 문을 연다.
낯선 커피 한 잔에서 느낀 향이 마음에 오래 남으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하다.
왜 이 커피에서는 꽃과 과일을 연상시키는 향이 나는지 궁금해지고, 같은 커피인데 왜 평소 마셨던 것보다 산미가 밝고 단맛이 길게 남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 질문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커피의 세계는 예상보다 훨씬 넓어진다.
어느 나라에서 생산되었는지를 보게 되고,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과 고도, 품종에 따라 커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열매를 언제 수확했는지와 어떤 방식으로 가공하고 건조했는지도 맛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며, 이후에는 로스팅 과정에서 열이 생두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물과 분쇄도와 시간이 추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궁금해하게 된다.
한 잔의 향을 이해하려 했을 뿐인데 자연과 농업, 화학과 물리, 노동과 유통, 역사와 문화까지 연결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커피를 공부하는 과정은 정보를 많이 모으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먼저 하나의 감각이 마음에 남고, 그 감각의 이유를 알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며, 질문이 새로운 질문을 불러오면서 세계가 넓어진다.
이때 커피는 더 이상 마시고 사라지는 음료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질문을 품고 있는 대상이 된다.
그레고리우스에게 아마데우의 바카라이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향한 문을 열었다면, 커피를 깊이 알아가기 시작한 사람에게 낯선 한 잔은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로 향하는 첫 번째 질문이 된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문장을 읽고 그렇게 강하게 움직인 이유는 바카라의 문장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문장을 읽은 모든 사람이 그처럼 강의실을 떠나 리스본행 열차에 오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문장은 그레고리우스의 내면에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현되지 못했던 어떤 결핍과 만났을 것이다. 반복되는 생활에 대한 피로일 수도 있고,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희미한 갈망이었을 수도 있다.
바카라이 그에게 전혀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냈다기보다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마음을 밖으로 끌어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래서 우연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삶을 만들어내는 마법이라기보다,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지만 아직 형태를 갖지 못한 가능성을 깨우는 사건에 가깝다.
커피에 대한 이끌림도 마찬가지다.
같은 커피를 여러 사람이 함께 마셔도 누군가는 맛있다는 말로 경험을 끝내고, 다른 누군가는 왜 이런 맛이 나는지 계속 궁금해한다. 어떤 사람은 산지에 관심을 갖고, 어떤 사람은 로스팅이나 추출을 배우며, 누군가는 결국 커피를 자신의 일로 선택하기도 한다.
그 차이는 커피 자체에만 있지 않다.
한 잔이 각자의 내면에서 무엇과 만났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출발점에는 언제나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갈망이 함께 존재한다.
영화에서 그레고리우스가 따라가는 한 권의 바카라은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다.
그는 아마데우가 남긴 문장을 읽으면서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그 문장을 따라 포르투갈의 정치적 현실과 저항, 사랑과 배신, 선택과 후회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
바카라 한 권에는 한 사람의 삶 전체가 그대로 들어 있지는 않지만, 문장은 그 사람이 바라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커피 한 잔에도 비슷한 성격이 있다.
한 잔의 커피를 만들기까지 특정 지역의 기후와 고도, 품종과 토양, 햇빛과 비의 시간이 있었고, 생산자는 열매가 익는 것을 기다리면서 수확 시기를 결정했다. 이후에는 가공과 건조, 선별과 저장을 거쳐 생두가 이동했고, 소비지에서는 로스터가 열을 통해 그 재료를 해석했으며 바리스타가 물과 시간의 조건을 조정해 최종적으로 한 잔을 만들었다.
마시는 사람은 그 모든 과정을 직접 보지 못한다.
그러나 한 잔에서 느껴지는 맛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맛을 만든 사람과 장소, 자연과 기술을 거꾸로 추적할 수 있다.
커피의 향미를 이해하려고 에티오피아의 생산지역을 찾아보다가 커피의 역사와 품종을 알게 되고, 중남미의 농장을 들여다보다가 고도와 기후, 노동과 거래구조의 문제까지 만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 잔은 결과이면서 동시에 출발점이다.
이미 긴 과정의 마지막에 놓여 있으면서, 마시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기 위한 첫 페이지가 된다.
그레고리우스의 리스본 여행은 처음에는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처럼 보인다.
그는 아마데우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과 친구, 사랑과 저항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이미 세상을 떠난 한 인간의 삶을 복원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마데우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그는 뛰어난 의사였고 다른 사람에게는 정치적 저항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사랑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이기도 했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레고리우스는 여행을 통해 알게 된다.
그리고 타인의 삶을 깊게 들여다볼수록 결국 자신의 삶 역시 다시 보게 된다.
아마데우가 했던 선택과 하지 못했던 선택, 사랑과 후회, 저항과 두려움은 그레고리우스에게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는 낯선 사람의 삶을 추적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고독과 미완의 욕망을 발견한다.
낯선 세계를 알아가는 일이 결국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돌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커피를 경험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커피에 대한 정보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 밝은 산미에 왜 끌리는지, 어떤 질감이 편안하고 어떤 맛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지 알게 된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의 평가와 점수, 유명한 산지의 이름을 따라 커피를 선택했다면 경험이 쌓이면서 점차 자신의 감각이 무엇에 반응하는지도 알게 된다.
취향은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경험과 기억, 문화와 학습을 통과하면서 계속 만들어지고 수정된다.
그래서 커피를 알아간다는 것은 외부의 대상을 공부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감각을 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좋은 여행의 의미는 얼마나 먼 곳까지 갔는지에만 있지 않다.
떠났던 사람이 돌아왔을 때 이전과 같은 장소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리스본으로 떠났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직업을 얻거나 과거의 삶을 모두 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마데우의 문장을 따라가며 만난 사람들과 기억, 리스본이라는 도시에서 경험한 시간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기준을 바꿔놓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이전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일상을 바라보기 어렵다.
커피를 깊이 알아가는 일에도 이런 변화가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맛있는 커피가 궁금했지만 그 맛을 따라가다 보면 생산자의 노동과 자연환경, 거래와 유통, 기후와 과학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 이전에는 가격만 보고 비싸다고 생각했던 커피를 생산과정을 알고 난 뒤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될 수도 있고, 유명한 이름보다 자신이 실제로 느낀 맛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지식은 감각을 바꾸고, 달라진 감각은 다시 선택을 바꾼다.
그래서 탐구는 단순히 아는 것을 늘리는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태도까지 조금씩 바꾼다.
그레고리우스는 실제로 열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이동하지만, 커피는 반대로 세계의 한쪽에서 우리가 있는 자리까지 이동해 오는 물질이다.
커피나무는 특정한 지역의 토양과 기후 속에서 자라고, 그곳에서 열매를 맺은 뒤 수확과 가공을 거쳐 생두가 된다. 이후 긴 유통과 이동을 통해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도시로 건너오고, 그곳에서 다시 로스팅과 추출을 거쳐 작은 잔에 담긴다.
우리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이미 긴 여행을 끝낸 결과다.
그래서 한 잔을 마신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그곳으로 가지 않아도 그곳에서 온 무언가와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 표현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커피 한 잔을 마셨다고 생산지의 현실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향미를 경험하는 것과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제적·슬롯적 조건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나 맛에서 시작된 호기심이 실제 장소와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는 있다.
한 잔에서 느낀 향이 그 커피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게 만들고, 생산자를 찾아보게 하며, 결국 커피가 이동하는 세계의 구조를 생각하게 한다면 감각은 세계를 향한 하나의 입구가 된다.
커피는 우리를 물리적으로 떠나게 하지는 않지만, 생각의 방향을 멀리 보낼 수 있다.
새로운 세계로 간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세계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자신의 지식과 독서, 오랫동안 살아온 삶을 모두 버리고 리스본으로 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오래도록 문장을 읽고 해석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데우의 글에 그렇게 깊게 반응할 수 있었다.
새로운 경험은 과거를 없애기보다 과거를 다시 보게 만든다.
커피도 그렇다.
어느 날 선명한 산미와 꽃향을 가진 커피를 경험했다고 해서 이전에 즐기던 진하고 구수한 커피가 모두 잘못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커피의 범위가 전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익숙함은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너무 오래 반복되면 세계의 경계를 자신의 경험과 동일하게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기 쉬워진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가끔 자신의 감각을 흔드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것은 한 권의 바카라일 수도 있고 한 사람과의 대화, 처음 듣는 음악이나 낯선 도시일 수도 있으며, 어느 날 우연히 마신 커피 한 잔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낯선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너무 빨리 자신의 기존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 태도다.
조금 더 가까이 가보고, 왜 자신이 거기에 끌렸거나 불편함을 느꼈는지 살펴보고, 그 경험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 순간 우연은 여행의 출발점이 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어디까지 가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움직이기 시작한다.
처음 그의 손에 있었던 것은 완성된 여행계획이 아니라 낯선 바카라과 몇 개의 문장, 그리고 그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끌림이었다.
아마 새로운 세계를 향한 대부분의 출발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목적지와 결말을 모두 알고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잘 모르기 때문에 한 걸음 더 가보고, 그 과정에서 처음의 질문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커피를 알아가는 일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감각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 커피는 왜 이렇게 향기로운지, 왜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지 궁금해서 시작한 질문이 어느 순간 자연과 과학, 역사와 문화, 노동과 경제를 향해 확장되고, 그 끝에서는 커피보다 자기 자신의 취향과 태도를 더 많이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한 잔의 커피가 인생을 극적으로 바꾼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한 잔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세계는 종종 거창한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아주 작은 틈을 통해 들어온다.
그레고리우스에게 그 틈은 우연히 만난 바카라 속의 몇 문장이었고, 커피를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하게 만난 한 잔의 향과 맛일 수 있다.
그 작은 이끌림을 지나치지 않고 이유를 따라가 보기로 하는 순간, 익숙했던 음료는 전혀 다른 세계의 입구가 된다.
그래서 한 잔의 커피는 낯선 세계에 대한 설명서가 아니다.
아직 무엇이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첫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