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와 잭슨 폴락, 그리고 커피의 추상성
지칠 때나 새로운 생각이 필요할 때면 혼자 찾아가는 공간이 있다. 환기미술관이다. 나는 미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아니고 김환기의 작품을 미술사적인 맥락에서 깊이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이상할 만큼 마음이 편안해진다. 점과 색, 여백과 반복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생각들이 천천히 가라앉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조금씩 정돈되는 느낌을 받는다.
한때 나는 ‘환기커피’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김환기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고요함과 깊이, 특유의 푸른색이 불러오는 정서, 수많은 점이 모여 하나의 우주처럼 확장되는 감각을 커피 한 잔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김환기의 그림을 커피로 흉내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기억과 감정을 점과 색으로 옮겨놓은 그림처럼, 커피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향과 맛을 하나의 감각적인 세계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더 가까웠다.
결국 ‘환기커피’라는 메뉴를 실제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때 떠올린 질문은 오래 남았다.
커피의 맛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향에는 고정된 형태가 없고 산미에는 정해진 색깔이 없으며, 입안에 머무는 질감과 여운 역시 손으로 붙잡을 수 없다. 한 잔을 마시는 동안 분명 존재했던 감각은 온도와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다가 결국 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사라지는 감각을 말하려 한다.
복숭아를 떠올리게 하는 산미, 재스민을 연상시키는 향, 다크초콜릿처럼 깊은 단맛, 홍차처럼 맑은 질감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제 커피 안에 복숭아나 재스민, 초콜릿과 홍차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에 경험했던 냄새와 맛, 사물과 장면 가운데 가장 가까운 기억을 불러온다.
보이지 않는 맛을 이미지로 옮기고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향을 기억 속 사물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나는 커피의 향미 언어가 추상미술과 닮아 있다고 느낀다.
추상미술이 눈앞의 사물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감정과 리듬, 기억과 에너지, 보이지 않는 관계를 점과 선, 색과 면으로 표현한다면 커피의 언어 역시 직접 볼 수 없는 감각을 꽃과 과일, 나무와 향신료 같은 이미지로 번역한다.
커피를 마시는 일이 감각의 경험이라면 그 맛을 말하는 일은 자신이 경험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다시 그려내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김환기의 후기 점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처음부터 분명한 이야기나 대상을 만나기보다 점과 색, 반복과 간격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먼저 경험하게 된다. 화면을 채운 수많은 점은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크기와 농도, 간격과 호흡이 조금씩 다르고, 그 작은 차이가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에 깊이를 만들어낸다.
하나의 점만 떼어놓으면 작은 흔적일 뿐이지만 그것들이 계속 이어지면 밤하늘이나 기억의 공간,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같은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구체적인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장소와 시간을 떠올리고, 직접 그려지지 않은 사람과 그리움까지 상상하게 된다.
김환기의 작품을 단순한 점의 반복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점들은 조형적인 요소인 동시에 기억과 시간, 거리와 감정이 축적되는 방식으로 읽힐 수 있으며, 화면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점 하나보다 점과 점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에 있다.
커피도 비슷하다.
한 모금에는 산미와 단맛, 쓴맛, 향과 질감, 온도와 여운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그것들을 완전히 분리해 경험하지 않는다. 각각의 감각은 작은 점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서로의 강도와 위치, 이어지는 순서가 관계를 맺으면서 한 잔 전체의 인상을 만든다.
좋은 커피를 마신 뒤 남는 기억 역시 단순히 “산미가 강했다”거나 “단맛이 좋았다”는 정보에만 머물지 않는다. 어떤 커피는 맑은 하늘처럼 느껴지고, 어떤 커피는 깊은 밤처럼 다가오며, 또 다른 커피는 갓 익은 과일처럼 생생하거나 오래된 나무처럼 차분하게 기억되기도 한다.
감각은 혀와 코에서 시작하지만 그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억과 이미지, 정서와 만나면서 한 잔은 물질적인 맛을 넘어 하나의 분위기로 확장된다.
김환기의 수많은 점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화면을 만들듯, 커피의 여러 감각 역시 각자의 자리를 찾을 때 비로소 한 잔의 세계를 만든다.
김환기의 작품을 바라볼 때 내가 자주 생각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여백이다. 그의 화면에서 비어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기보다 점과 점 사이를 숨 쉬게 하고, 색과 색 사이에 깊이를 만드는 적극적인 공간처럼 느껴진다.
여백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점은 더 선명해지고, 반복은 단순한 무늬가 아니라 리듬으로 읽힌다.
커피에도 이와 비슷한 여백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향과 맛이 동시에 강하게 밀려온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커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산미가 지나치게 날카로워 다른 감각을 덮거나, 쓴맛이 전체를 지배하고, 향이 너무 강하고 복잡해서 서로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면 오히려 한 잔은 쉽게 피로해질 수 있다.
반대로 균형이 좋은 커피에서는 각각의 감각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다른 감각이 들어올 자리를 남긴다. 처음에는 향이 먼저 다가오고, 그 뒤에 산미와 단맛이 관계를 맺으며, 삼킨 뒤에는 질감과 여운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남을 수 있다. 감각이 한꺼번에 소리치는 대신 시간 안에서 차례와 간격을 갖는 것이다.
나는 이 간격을 커피의 여백이라고 생각한다.
로스팅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자신의 로스팅 색깔을 지나치게 강하게 밀어붙이면 생두가 가진 차이가 흐려질 수 있고, 반대로 충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재료의 잠재력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을 수 있다. 추출에서도 가능한 모든 성분을 많이 끌어내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며, 부족한 추출 역시 커피의 구조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할 수 있다.
좋은 커피를 만든다는 것은 무언가를 계속 추가하거나 강하게 만드는 작업만이 아니다. 무엇을 어느 정도 보여줄 것인지, 어느 지점에서 멈출 것인지, 한 감각이 다음 감각을 위해 어느 정도의 공간을 남겨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은 로스터와 바리스타는 커피를 큰 목소리로 말하게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각각의 감각이 자기 목소리로 충분히 나타날 수 있도록 관계와 여백을 조정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맛을 구성하는 일에는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판단과 함께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들어 있다.
김환기의 회화에서 점과 여백, 기억과 고요함을 떠올린다면 잭슨 폴락의 작업에서는 훨씬 더 역동적인 움직임을 생각하게 된다.
폴락은 캔버스를 이젤 위에 세워놓고 하나의 대상을 묘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놓고 그 주변을 움직이며 물감을 떨어뜨리고 흘리고 겹쳐나갔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완성된 이미지인 동시에 그것을 만들어낸 몸의 움직임과 시간의 흔적이 되었다.
화면 위의 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의 고정된 선이라기보다 어느 순간 몸이 지나간 궤적처럼 느껴진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고, 어느 순간 속도를 바꾸었으며, 어디에서 멈췄다가 다시 시작했는지가 물감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폴락의 작품은 결과이면서 동시에 행위의 기록이다.
커피에도 비슷한 행위성이 존재한다.
특히 핸드드립에서는 물을 붓는 높이와 속도, 물줄기의 굵기, 커피층을 적시는 범위와 타이밍이 추출과정에 영향을 준다. 같은 원두와 비슷한 레시피를 사용하더라도 실제 추출 중에 물을 어떻게 공급하고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컵의 인상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핸드드립을 바라볼 때 가끔 ‘물로 그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물감이 캔버스 위를 지나가며 흔적을 남긴다면 물은 커피층을 통과하면서 여러 성분을 녹여내고, 그 움직임의 결과를 향과 질감, 농도와 여운이라는 형태로 컵 안에 남긴다. 눈에 보이는 선은 사라지지만 바리스타가 어떤 방식으로 물을 다루었는지는 결국 맛의 구조에 흔적을 남긴다.
폴락이 물감을 통해 몸의 리듬을 화면에 기록했다면, 바리스타는 물의 흐름을 통해 커피가 가진 향미의 관계를 조율한다.
그렇다고 폴락의 작업을 단순한 우연이라고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물감이 떨어지는 모든 위치와 모양을 사전에 완벽하게 계산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작업은 반복된 경험과 몸의 움직임, 재료에 대한 이해 안에서 이루어졌다.
물감의 점도와 흐름, 몸의 위치와 속도, 색을 더하거나 멈추는 순간에는 작가의 판단이 개입한다. 따라서 작품에는 우연한 요소와 통제된 요소가 동시에 존재한다.
커피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요소를 많이 포함한다.
생두는 농산물이기 때문에 같은 품종과 농장의 커피라도 수확연도와 기후, 가공과 보관조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고, 로스팅에서도 생두의 상태와 장비, 환경의 작은 변화가 결과에 영향을 준다. 추출단계에서도 분쇄입자의 분포와 물의 성질, 온도와 유속, 기구와 환경 같은 여러 요소가 동시에 작용한다.
따라서 커피를 만드는 사람은 가능한 변수를 기록하고 조절하면서도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동일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좋은 커피가 우연에 의존해서 만들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통제할 수 있는 요소를 최대한 이해하고 재현성을 높이되, 예상과 다른 변화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커피와 예술은 흥미롭게 만난다.
예술이 완벽한 계산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작위적인 충동만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듯, 커피 역시 정해진 공식을 그대로 반복한다고 언제나 같은 품질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막연한 감각에만 의지해서는 안정적인 결과를 만들기 어렵다.
기술과 감각, 계획과 즉흥적인 판단, 데이터와 몸의 경험이 서로 보완되는 지점에서 하나의 결과가 만들어진다.
좋은 기술자는 우연을 숭배하는 사람도 아니고 모든 우연을 제거하려는 사람도 아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충분히 넓힌 뒤에도 남아 있는 변화와 차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커피를 설명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우리가 대부분 다른 사물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두 같다거나 오렌지 같다, 재스민이나 초콜릿, 홍차나 견과류가 떠오른다고 말하지만, 실제 커피에 그런 재료가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향과 맛을 과거에 경험했던 감각과 비교해 가장 가까운 기억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향미의 언어는 단순한 재현이라기보다 연상과 비교의 언어에 가깝다.
추상미술이 눈앞의 대상을 사실적으로 복제하지 않고 감정과 리듬을 색과 선, 형태와 공간으로 옮기듯 커피의 향미 언어도 직접 볼 수 없는 감각을 다른 이미지와 기억을 통해 표현한다.
이 때문에 향미를 말하는 일에는 과학적인 측면과 개인적인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과학은 커피의 향에 관여하는 여러 화합물과 로스팅 과정의 반응을 연구할 수 있고, 감각과학은 사람들이 맛과 향을 어떻게 지각하고 구별하는지를 탐구한다. 반면 실제 사람이 그 향을 경험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기억과 문화적 경험도 함께 개입하기 때문에 같은 계열의 향을 두고도 누군가는 복숭아를 떠올리고, 다른 사람은 살구나 감귤을 떠올릴 수 있다.
누군가에게 특정한 꽃향은 어린 시절의 정원을 떠올리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여행지의 기억을 불러올 수도 있다.
감각은 물질에서 시작하지만 기억을 통과하면서 개인의 언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커피를 표현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답을 맞히는 시험과 같을 수 없다. 물론 감각을 훈련하고 공통의 용어와 기준을 익히는 것은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실제로 느낀 차이를 구체적으로 구별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기는 능력이 필요하다.
좋은 커피인은 향미 단어를 가장 많이 외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것을 정확하게 구별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에 가깝다.
어떤 커피는 시간이 지나도 색이나 이미지로 기억된다.
맑고 밝은 산미와 투명한 질감을 가진 커피를 떠올리면 밝은 노란색이나 투명한 빛을 연상할 수 있고, 깊은 단맛과 묵직한 질감을 가진 커피에서는 짙은 갈색이나 어두운 색이 떠오를 수도 있다. 물론 커피 자체의 실제 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감각의 언어를 빌려오는 것이다.
어떤 커피는 색보다 하나의 장면으로 남는다.
창가에 놓여 있던 잔과 오후의 빛, 천천히 식어가던 커피의 온도, 펼쳐놓은 바카라과 테이블 위의 손, 대화 사이에 잠시 찾아왔던 침묵 같은 것들이 맛과 함께 기억 속에 들어간다.
우리는 커피의 성분이나 향미만을 기억하지 않고 그것을 경험했던 상황 전체를 함께 저장한다.
이 지점에서 한 잔은 추상적인 이미지와 닮아간다.
벽에 걸린 그림처럼 고정된 형태로 남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색과 분위기, 감정과 장면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가 시간이 지나 비슷한 향이나 음악, 장소를 만났을 때 다시 떠오른다.
김환기의 그림이 점과 여백을 통해 직접 그려지지 않은 기억과 그리움, 우주적인 감각을 떠올리게 하고, 폴락의 작품이 물감이 지나간 흔적을 통해 몸의 움직임과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면 좋은 커피 역시 향과 맛, 온도와 질감을 통해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는 잠시 컵 안에 머문 뒤 사람의 기억 속으로 이동한다.
커피는 분명 구체적인 물질에서 시작한다. 생두가 있고 로스팅이 있으며, 분쇄와 추출을 거친 실제 액체가 컵에 담긴다. 이 과정의 많은 부분은 측정하고 분석할 수 있으며, 온도와 시간, 농도와 추출수율처럼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도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이 그 커피를 마시는 순간부터 경험은 물질의 분석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향은 기억을 불러오고, 산미와 단맛은 이미지와 관계를 맺으며, 질감과 온도는 그 순간의 기분과 장소의 분위기 속에서 경험된다. 같은 커피라도 누가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마시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과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커피의 추상성을 생각한다.
커피는 손에 잡히는 음료지만 한 잔을 경험한 전체의 느낌은 손으로 붙잡을 수 없다. 분명 입안에서 사라졌는데 시간이 지난 뒤 어떤 색이나 장면, 사람과 장소의 기억으로 다시 나타난다.
김환기는 점과 색, 여백을 통해 직접 보이지 않는 기억과 정서를 화면에 옮겼고, 잭슨 폴락은 몸의 움직임과 시간을 물감의 흔적으로 남겼다. 커피는 그들과 전혀 다른 재료와 방식으로, 향과 맛이라는 순간적인 감각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서 좋은 커피를 마신 뒤 우리가 꺼내는 말은 언제나 조금 부족하다. 복숭아와 재스민, 초콜릿과 홍차, 꽃과 과일, 나무와 향신료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만으로 방금 경험한 한 잔 전체를 완전히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말하려 한다.
사라지는 감각을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커피의 언어는 완전하지 않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계속 확장된다. 새로운 향을 경험할 때마다 새로운 비유를 찾고, 이전에는 구별하지 못했던 감각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언어도 조금씩 세밀해진다.
나는 그래서 좋은 커피를 마시는 일을 한 편의 추상화를 바라보는 일과 비슷하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설명보다 감각이 먼저 도착하고, 그 뒤에 기억과 이미지가 따라오며,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생긴다.
한 잔을 다 마신 뒤에도 그 맛이 색과 분위기, 어떤 장면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 커피는 이미 마시는 순간을 넘어 기억의 세계로 이동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단순히 맛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그림을 경험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