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음을 없애지 않고 뉴런으로 썼다

반도체 잡음이 계산 자원이 된 순간

byAI러 이채문


반도체에서 발생하는 잡음은 보통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신호를 흐리고 계산의 정확도를 떨어뜨리는 불청객으로 취급돼 왔다.

그런데 KAIST 연구진은 이 익숙한 전제를 뒤집었다. 잡음을 줄이는 대신, 그 잡음 자체를 뉴런이 신호를 발생시키는 재료로 사용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뇌를 닮은 반도체’를 만들었다는 데 있지 않다. 기존 시스템이 버리려 했던 물리적 불확실성을 계산 자원으로 전환했다는 데 이번 연구의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잡음이 뉴런의 발화가 되다

KAIST 김경민 신소재공학과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것은 프로그래밍 가능한 확률적 뉴런, PPN이다. 이 구조는 Ru/TaOx/Pt로 구성된 비휘발성 멤리스터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전류 잡음을 이용한다.

멤리스터의 저항 상태가 달라지면 전류 잡음의 크기와 신호대잡음비도 변한다. 연구팀은 이 특성을 이용해 인공 뉴런이 스파이크를 발생시키는 확률을 조절했다.

즉 회로 내부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잡음을 억제하는 대신, 그 흔들림을 뉴런의 동작 일부로 끌어들인 것이다.


생물학적 뉴런의 불확실성을 닮다

이 아이디어는 실제 뉴런의 특성과도 연결된다. 생물학적 뉴런은 같은 자극을 받더라도 언제나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발화하지 않는다.

이온 채널이나 막 저항의 상태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고, 일정한 확률성을 가진다. 연구진은 이러한 특징을 멤리스터의 확률성과 프로그래밍 가능성으로 구현하려 했다.

PPN 회로에서는 멤리스터에서 발생한 전류 잡음을 증폭한 뒤 외부 잡음을 걸러내고, 최종적으로 확률적인 스파이크 신호로 변환한다. 물리적인 잡음이 곧 정보 표현 방식으로 바뀌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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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뉴런이 다른 주파수를 읽는다

이번 연구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동일한 하드웨어 구조를 서로 다른 성격의 신호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멤리스터의 저항 상태를 프로그래밍해 PPN이 특정 주파수 영역의 입력에 선택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회로를 새로 만드는 대신 내부 상태를 바꾸는 방식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서로 성격이 크게 다른 두 종류의 시계열 데이터가 사용됐다. 하나는 사람의 움직임을 담은 UCI HAR이고, 다른 하나는 음성 데이터인 Audio MNIST다.


움직임과 음성을 같은 구조로 처리했다

UCI HAR에서 주요 분석 주파수 범위는 0.4~25Hz다. 반면 Audio MNIST는 20Hz~8kHz 범위의 훨씬 높은 주파수 신호를 포함한다.

연구진은 동일한 PPN 하드웨어에서 멤리스터의 저항 상태만 바꾸면서 두 신호를 모두 인코딩했다. 그 결과 인간 활동 데이터에서는 94.8%의 F1 점수, 음성 데이터에서는 95.0%의 분류 정확도를 기록했다.

여기서 의미 있는 지점은 두 수치 자체보다 구조의 재사용 가능성이다. 입력 신호가 바뀔 때마다 뉴런 회로를 별도로 설계하는 대신, 하나의 구조를 조절해 서로 다른 시간 규모의 데이터를 처리할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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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던 물성을 계산 자원으로 바꾸다

기존 반도체 설계에서는 잡음과 변동성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가능한 한 일정하고 예측 가능한 동작을 만드는 것이 좋은 소자의 조건으로 여겨졌다.

이번 연구는 그 방향과 조금 다르다. 완벽하게 제거하기 어려운 소자의 확률성을 그대로 인정한 뒤, 오히려 그것을 기능으로 사용한다.


하드웨어를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방법

특히 주목할 부분은 서로 다른 주파수를 처리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뉴런 구조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멤리스터의 저항 상태를 바꾸는 방식으로 반응 영역을 조절했다.

이 접근이 확장된다면 센서가 받아들이는 신호의 종류에 따라 하드웨어 자체를 계속 바꾸는 대신, 하나의 뉴런 구조를 상황에 맞게 조절하는 설계가 가능해질 수 있다.

연구진 역시 이러한 구조가 다양한 주파수의 시계열 신호를 다루는 소형·적응형 뉴로모픽 하드웨어에 활용될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직은 가능성을 입증한 단계다

다만 이번 연구를 곧바로 초저전력 AI 반도체의 완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

현재 연구는 개별 멤리스터와 증폭·필터·비교 회로를 이용한 실험, 그리고 데이터셋을 통한 성능 검증 단계다. 대규모 다중 뉴런이 집적된 상용 반도체에서 어느 정도의 전력 절감 효과가 나타나는지는 직접 입증되지 않았다.

94.8%와 95.0%라는 숫자 역시 에너지 효율이 아니라 각각 인간 활동과 음성 분류 성능을 나타내는 지표다. ‘저전력’이라는 표현은 현재의 측정 결과라기보다 이 구조가 지향하는 뉴로모픽 하드웨어의 가능성에 가깝다.

실제 웨어러블 기기나 음성 센서 등에 적용하려면 멤리스터와 주변 회로를 하나의 칩 안에 집적하고, 이를 다수의 뉴런으로 확장하는 단계가 더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분명하다. 더 좋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불완전성을 제거하는 대신, 불완전성을 계산의 일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미래의 뉴로모픽 반도체는 인간의 뇌를 단순히 구조적으로 복제하는 방향만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불확실성과 잡음까지 계산 과정에 포함시키는 방식이 생물학적 정보처리에 한 걸음 더 가까운 길이 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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