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삶의 태도가 될 때: 수용과 용기, 무던함

기어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멋쟁이’로 살아갈 수 있기를.

by옫아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과 한계 앞에 서게 된다.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타인의 마음이나 지나간 과거는 아무리 쥐어짜도 바꾸어놓을 수 없다.


이러한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종종 깊은 무력감이나 불안에 빠지곤 한다.

이때 라인홀트 니부어의 ‘평온의 기도’는 우리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려주는 명확한 이정표가 되어준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 기도는 삶을 바라보는 세 가지 핵심적인 축—수용, 행동, 그리고 분별력을 제시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타인의 반응, 환경, 지난날의 결과 등)을 마주했을 때는 애써 다투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평온함’이 필요하다. 그것은 포기나 무기력이 아니라 헛된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반대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나의 태도, 오늘의 선택, 스스로의 성장 등) 앞에서는 두려움을 깨고 나아가는 ‘용기’가 요구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오만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길을 가려내는 눈이 바로 ‘지혜’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말하는 ‘지혜’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 삶 속에 안착해야 할까?

최근 친구가 공유해준 박완서 작가의 문장은 이에 대한 참으로 아늑하고도 깊은 답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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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기도문이 청하는 ‘구별하는 지혜’가 머리로만 파악한 차가운 지식에 그친다면,

그것은 박완서 작가의 표현대로 ‘코끝에 걸려 있는’ 지식에 불과할 것이다.


구별할 줄 안다고 해서 남을 비판하거나, 자신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며 조급하게 굴면

지혜는 가벼워지고 삶은 뾰족해진다.


참된 지혜는 코끝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내부에 안정되어’ 비로소 단단한 삶의 결이 된다.


바꿀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무던함’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내가 바꿀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차분히 변화시켜 나가는 주체성을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혜가 내면에 차분히 가라앉아 삶의 인품으로 배어 나오는 모습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탓하며 불평하기보다 그것을 무던하게 품어내고,

바꿀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용기 있게 가꾸어 나가는 사람.


얕은 지식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고

내면의 깊이로 삶의 파도를 넘어서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멋쟁이’가 아닐까.


결국 니부어의 기도와 박완서 작가의 글귀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


그것은 삶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그 모든 성찰을 내면에 조용히 품어내는 식물의 생장과 같은 성숙함이다.


오늘도 삶의 수많은 소란 앞에서 나지막이 되뇌어 본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무던하게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기꺼이 바꾸어 내는 용기를,

그리고 이 모든 지혜가 코끝이 아닌 내 마음에 깊이 뿌리내려

기어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멋쟁이’로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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