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니아 - 지구를 떠나거라

by블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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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를 주름잡던 코미디언 김병조의 유행어 “지구를 떠나거라!”가 떠오르는 <부고니아>.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시대의 공기를 덧입힌 재해석이다. 원작이 개인의 망상과 슬롯적 억압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냈다면, ‘부고니아’는 그 망상을 오히려 현실의 연장선 위에 올려놓는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이제는 누가 정상이고 누가 광기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물류센터 직원 테디는 거대 바이오 기업의 시스템 속에서 소모되는 존재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려다 실패했고, 그 대신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선택한다. “외계인의 침공.” 그의 믿음은 황당하지만, 그 황당함은 오늘날 음모론이 퍼지는 방식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복잡한 세계를 단순한 이야기로 환원하려는 욕망,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선택된 자’로 위치시키는 심리. 테디는 비극적인 동시에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이다.


그가 납치한 사장 미셸을 연기한 엠마 스톤의 변신은 이 영화의 중심축이다. 삭발이라는 외형적 결단보다 더 인상적인 건,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태도다. 그녀는 외계인이 아니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점점 중요하지 않게 된다.


제시 플레먼스가 연기한 테디는 광기와 순수 사이를 오간다. 그의 눈빛에는 확신이 있지만, 그 확신은 어디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은 어느 순간 그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때때로 비약적인 해석에 기대기 때문이다. 사촌 동생 돈은 그런 테디의 세계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존재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 혹은 생각을 포기한 인간. 영화는 그를 통해 또 다른 형태의 공허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외계인이 지구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영화는 곧 방향을 틀어버린다. 어쩌면 외계인은 이미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외계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기후위기, 자본의 폭주, 환경 파괴. 이 모든 것은 외부의 침공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한 자해에 가깝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경고처럼 다가온다. 리셋 이전에 반드시 시스템 종료가 필요하다는 암시. 그것은 파괴일 수도 있고, 정화일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분리수거를 하면서 아파트 한 동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활용쓰레기의 양을 볼 때 압도되는 그 심정이다.


여기서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전작처럼 “정말 외계인이었나?”라는 퀴즈를 던지지 않는다. 대신 훨씬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믿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그 믿음이 타인을 향할 때 얼마나 쉽게 폭력으로 번질 수 있는가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진실보다 믿음이 더 강해지는 순간, 세계는 설명되는 대신 왜곡된다. 종교가 정치보다 무서운 까닭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은근히 건드리는 감정 하나가 더 있다.


우리는 때때로 정말로 그런 상상을 한다. 누군가 우리의 삶을 통째로 데려가 줬으면 하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뚫리지 않는 벽 앞에서, 지구별의 희망이 잘 보이지 않을 때,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앞에 서 있을 때. 그럴 때 “외계인의 납치”는 공포가 아니라 일종의 탈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주 잠깐, 바카라임도 맥락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 기독교에서 말하는 휴거도 그런 맥락에서 상통한다. 무바카라임한 지구탈출인가, 가련한 비명인가.


그래서 ‘부고니아’는 묘하게 잔인하다. 테디의 망상을 비웃게 만들면서도, 그 망상의 뿌리에 있는 감정만큼은 이해하게 만든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 그리고 누군가 대신 결론을 내려주길 바라는 기대. 그럴 때 떠오르는 건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70년대 코미디언 이기동의 오래된 농담 하나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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