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분야에 AI를 적용해야 할까?

도구에 일을 맞추지 말고, 일에 도구를 맞출 것

by낭만직딩

"기존 업무에 억지로라도 AI를 붙이라는데 진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


오늘 근심걱정이 한 가득인 동료와 같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째 끝없는 회의를 거듭하며 아이디어를 짜내다 결국 도움을 구하러 찾아온 것입니다.


동료가 맡은 일은 콘텐츠 기획과 제작이었습니다. 지금 이 업무에 정말 필요한 것은 고도의 AI 기술이 아니라 생각해왔습니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획의 디테일을 다듬고, 브랜드의 고유한 톤앤매너를 지키며 기존에 해오던 콘텐츠의 완성도를 한 뼘 더 끌어올리는 ‘내실’이 중요하다고 여겨왔죠.


하지만 "무조건 최신 AI 기술을 접목하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존 콘텐츠를 더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실무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AI기술을 어떻게든 가져다 붙이려고, 보고를 위한 보고를 하기 위해 몇 달째 진땀을 빼고 있었죠.


동료의 하소연을 가만히 듣다 문득 한 문장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풀어야 할 문제에 맞춰 도구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손에 쥔 AI라는 화려한 망치에 맞춰 멀쩡한 업무를 못으로 둔갑시키고 있던 것입니다.


요즘 (일부)기업들의 모습이 딱 이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조직마다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AI'입니다. 위에서는 "업무와 사업에 AI를 적용하라"는 탑다운 지시가 연일 쏟아집니다. 뒤쳐지면 당장이라도 도태될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시가 떨어진 뒤 현장의 풍경은 어떨까요?

안타깝게도 혁신의 활기보다는 피로감이 먼저 감돕니다.


기존에 별문제 없이 잘 굴러가던 일에 억지로 AI라는 딱지를 붙이느라 또다시 AI를 활용합니다.


결국 본래 일보다 'AI를 쓰는 척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업무 추진에 발목이 잡히고, 실무자들은 뒷목을 잡습니다.


과연 모든 영역에 AI를 억지로 욱여넣는 것이 맞을까요?

도구의 함정에 빠져 헛되이 에너지를 쓰게 되는 3가지 이유를 짚어봅니다.



01. 모종삽으로 심을 화분에 포크레인을 끌고 옵니다.


흙을 깊고 넓게 파내야 하는 공사 현장에서는 포크레인이 최고의 장비입니다. 하지만 베란다 화분에 작은 꽃 한 송이를 심을 때는 손 모종삽이 훨씬 빠르고 정확합니다.


모종삽으로 1분이면 끝날 일을 두고 '최신 첨단 장비를 써야 혁신'이라며 거대한 포크레인을 끌고 오면 어떻게 될까요? 일은커녕 귀한 화분만 깨지고 맙니다.


지금 조직들이 겪는 혼란이 이와 같지 않을까요? 일의 규모와 성격에 맞는 도구가 따로 있는데 무조건 가장 크고 최신인 'AI 포크레인'만 들이밀다 보니 현장의 일상적인 프로세스가 깨지고 비효율이 발생합니다. 도구는 상황과 목적에 맞게 선택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습니다.



02. '문제'가 아니라 '도구'에서 출발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가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에서 출발합니다. 풀어야 할 숙제가 명확해야 어떤 도구를 꺼내 들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I만능주의가 생기는 순간, 그 순서가 꼬여버리게 됩니다. "일단 AI를 써라"라는 도구가 먼저 주어지고, 그 도구를 쓰기 위해 억지로 문제를 찾아 헤매게 되죠.


불명확한 업무 지시, 복잡한 결재 라인, 부서 간 단절된 소통처럼 정작 현장을 가로막는 진짜 병목은 따로 있습니다. 조직의 일하는 방식과 체질은 그대로 둔 채 겉면에 AI라는 포장지만 덧씌운다고 해서 일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문제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도입하는 기술은 혁신이 아니라 그저 '또다른 일거리'이자 낭비일 뿐입니다.



03. 현장의 '전문성'과 ‘맥락’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그 일의 디테일과 맥락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현장에서 매일 발로 뛰는 실무자입니다. 어떤 일은 데이터나 자동화보다 사람의 직관과 섬세한 감각, 축적된 노하우가 들어갈 때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AI를 접목하라"는 획일적인 지시는 실무자들의 전문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의 손길이 꼭 필요한 영역까지 무리하게 기계적 적용을 요구받을 때 업무의 엣지는 사라지고, 실무자들은 효능감을 잃고 소진될 것입니다.


AI는 실무자의 전문성을 돕는 훌륭한 서포터이자 파트너가 되어야지, 실무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피로를 더하는 억지 숙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못에 이런 망치를 꺼내드는 게 옳은 걸까요?


어디에 AI를 쓸까? 가 아니라
우리에게 지금 어떤 문제가 있는가?


진짜 혁신은 바로 이 질문의 순서를 바꾸는 것에서 시작되는게 아닐까 합니다.


혁신은 "어디에 망치를 휘두를까?"를 찾는 일이 아닙니다.

"박아야 할 못이 정말 거기에 있는가?"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풀어야 할 문제가 명확할 때, 그리고 그 문제를 푸는 데 기존 방식보다 AI가 확실히 나을 때만 꺼내 들면 됩니다.


도구에 일을 맞추지 말고, 일에 도구를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실무자도 살고, 조직도 진짜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AI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향하는 '방향'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고 싶을 뿐입니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AI를 기가 막히게 활용해 일의 날개를 단 조직들도 많습니다. 데이터 노가다로 며칠 밤을 새우던 엑셀 작업을 클릭 한 번으로 끝내고 정시퇴근을 사수하거나, 아이디어가 막힐 때 AI를 뇌가 말랑말랑한 유능한 인턴처럼 부려먹으며 인사이트를 얻는 똑똑한 동료들도 수두룩합니다. 적재적소에 잘만 쓰면 정말 고마운 존재이죠.


결국 포크레인이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땅 팔 데 없나?"라며 멀쩡한 화단만 기웃거리는 조급함일 뿐이죠.

진짜 스마트한 조직은 모든 직원의 손에 억지로 무거운 전기톱을 쥐여주지 않습니다. 연필을 깎아야 할 땐 작고 날렵한 칼을 건네고, 거대한 나무를 베어야 할 때 비로소 톱을 꺼내 들게 합니다.


기술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더 신나고 똑똑하게 일하도록 돕는 '조연'일뿐입니다. 부디 AI라는 화려한 조연을 모시느라 일의 진짜 '주연'인 사람과 일의 본질이 무대 밖으로 쫓겨나는 일은 없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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