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PM으로 성장하기
아니 아까 나 너무 화났잖아.
다음 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회의하자고 했으면
알아서 딱 회의실 예약 해놔야 하지 않아?
어후... 기획자가 저렇게 센스가 없어서야....
한바탕 공격적인 회의가 끝나고 나와 팀장이 말했다. 그가 지적한 것은 막내 기획자였는데 이제 입사한 지 일 년이 막 될까 말까 한 친구였다. 연차도 1년이 안된 친구라 그런지 팀장은 유독 그 친구에게 엄격했다. 첫 슬롯생활이니 풀어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회의 시간 내내 눈총을 주던 팀장은 결국 그날 퇴근 녘에 막내를 세워두고 한참 잔소리를 하고 나서야 회의실 예약을 지시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단순한 게시판 형식의 메뉴가 추가되어야 하는 일이 있어 주임급의 기획자에게 급하게 업무를 넘겼다.
XX프로젝트에 있는 AA메뉴랑 비슷한 메뉴거든? 부서함 열어보면 그 프로젝트 설계서 있을 거야. 그거 참고해서 내일까지 초안 마무리 좀 해주세요.
내 생각엔 늦어도 하루 안에 끝낼 만큼 단순하고 페이지 수도 많지 않은 메뉴였기 때문에 그렇게 업무 지시를 했는데 다음날 퇴근시간까지 주임급 기획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5시가 넘어서 결국 내가 먼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설계서 마무리 되었나요?
넵! 6시 전까지 완료 가능합니다. 완료해서 메일 드리겠습니다! :)
응? 당황스러웠다. 처음 든 생각은 작업시간을 너무 짧게 주었나? 였다. 오늘까지 마무리해 달라고 했으면 최소한 오후 4시 정도엔 공유해주어야 하지 않나? 평소 그 친구의 작업 속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명랑하게 이모티콘까지 붙여 대답한 그녀의 텍스트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스크롤해서 이전 대화를 다시 살펴보았다.
대화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오늘까지 완료해 달라고 요청을 했고, 그녀는 오늘 완료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문제는 오늘이라는 기한 안에 내가 문서를 받아 검토하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결국 정확히 전달을 했으면 되는 사항을 눈치껏, 알아서 하기를 바란 팀장과 나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일정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다음날 검토를 해도 늦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어 명랑한 그녀의 메시지에 짧은 답변을 하고 대화를 끝냈다.
회의실 예약이 필요하면 요청하면 될 일이고, 검토 시간이 필요하면 정확히 몇 시까지 마무리해서 공유해 달라고 말하면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끝날 일이다. 그깟 말 몇 마디 더하는데 대단히 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아닌데, 말하지 않은 걸 알아서 하라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뒤가 안 맞다.
혹자는 그런 눈치를 두고 슬롯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인정이 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누구나, 모든 것에는 처음이라는 시점이 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단순히 연차의 문제라고 할 수도 없다. 그 슬롯, 그 조직 내부에서의 질서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니 이런 부분은 정확히 공지하고 당연히 공유해야 하는 부분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단순히 세대의 문제라거나 슬롯성의 결여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가혹하고 섣부르다.
그제야 지난날의 내가 보였다. 소위 말하는 일머리, 센스 같은 것들을 처음부터 타고났을 리는 없다. 분명 내가 첫 시작점 어딘가에 있을 때 누군가는 그런 나 때문에 답답했을 것이고, 몇 번씩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참아주었을 것이다. 그저 오랫동안 쌓아온 경력 덕에, 야만의 시대를 헤치고 나와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자만에 어설펐던 그 나의 그 시절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지. 말해주자, 알려주고 가르쳐주면 되지. 오늘도 오지 않는 메일을 기다리며 그렇게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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