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는가?

딸에 대하여, 민음사, 2017

by주혜나

알고 보니 ‘엄마에 대하여’

김혜진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다. 작가는 특히나 소설의 제목을 짓는 일이 어렵다고 했다. 이 바카라의 제목도 출간 회의 중에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니 ‘딸에 대하여’라고 정하게 되었다고 했다.
소설을 읽고 보니 제목을 ‘엄마에 대하여’라고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딸보다 딸의 엄마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첫 장을 읽으면서부터 어딘가 친숙한 듯, 동시에 낯설었다. 잠시 멈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환갑이 넘은 여자, 서른이 넘은 자녀 때문에 여전히 전전긍긍하는 엄마를 화자로 내세운 소설을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모녀를 다루는 많은 서사들 속에서 엄마의 전화를 무시하는 딸의 모습은 흔했지만 딸의 전화를 피하며 변명까지 하는 엄마의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엄마는 항상 딸의 들러리처럼 딸을 기다리는 존재로만 그려졌던 것 같다.

이런 엄마의 행동이 활자로 적혀 있는 것이 낯설었으나, 삶을 생각해 보니 또 그리 낯선 일도 아니었다. 기숙고등학교에 다니는 나의 딸도 하루에 두세 번씩 전화를 한다. 한참 집중하고 있을 때 아이의 얼굴이 화면에 뜨면 나도 자주 ‘그냥 받지 말까?’ 망설인다. 그래도 전화를 받으면 습관처럼 아이의 목소리부터 살핀다. 소설 속 엄마도 자리에 앉자마자 딸아이의 얼굴부터 살폈다.

그린은 처음부터 자신의 삶에 비교적 확신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엄마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면서도, 레인에게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그린은 주눅 들지 않는다. 성소수자의 삶에도, 자신이 참여하는 슬롯적 활동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나이 먹도록 나는 안정되지 못하고 무엇을 하는 걸까.’ 하는 자기연민 따위는 그녀에게 찾아보기 힘들다.

레인 또한 강하고 단단하다. 자신의 파트너의 엄마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을 때도 레인은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이 왜 이렇게 살고 있으며, 이것이 왜 자신에게 타당한 일인지 조용하지만 똑 부러지게 말한다. 또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 해도 그녀는 타인에게 사랑을 주고, 돌보아 준다.

그린과 레인도 많이 흔들리고 아파했을 것이다. 다만 이 소설에서 그들의 흔들림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이 소설이 엄마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 화자인 엄마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변한다.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살면서 서로의 집에 일어나는 갖은 대소사를 다 알고 있는 이웃들은 오랜 벗이자 적이다. 혼기를 훌쩍 넘긴 딸이 갑자기 들어와 같이 사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딸의 동성 파트너까지 데려와 함께 산다니. 아무도 대놓고 묻지 않는다고 해도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릴 게 분명하다. 하나뿐인 딸아이는 왜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인지, 자신의 자랑이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왜 수치가 되는 것인지. 그녀가 딸아이와 그 파트너에게 터뜨리는 분노는 그녀 자신에게 너무도 타당하다.

그런 엄마가 소설 속에서 서서히 변해간다. 천천히, 조금씩 단단해지더니 어느 날엔 바꿀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바위에 계란을 냅다 던지고야 만다. 늙고 병들어 버림받은 젠을 돌보는 경험과 딸이 처한 현실을 동시에 겪으며 엄마는 딸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받아들일 수 없는 딸, 놓을 수 없는 젠

엄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딸과 그녀의 동성 파트너 레인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어한다. 한 침대에서 서로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딸아이와 그 파트너를 보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린의 자리에 나의 딸아이가 누워 있는 장면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좌우로 재빠르게 털었다. 딸의 파트너인 레인에게 퍼부은 엄마의 분노를 나는 차마 탓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가족도 아닌 젠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 타인인 젠을 오히려 이해하고 돌본다. 혈연인 딸에게는 정상성의 조건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면서, 혈연이 아닌 젠에게는 아무 조건 없이 존엄을 지켜주려 한다. 독자는 이런 엄마의 모순을 지켜보게 된다.

젠은 따뜻하고 고왔지만 비참하게 죽어갔다. 타인에게 선한 일도 많이 하며 살아왔기에 굵직한 상도 받았고 따르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자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엄마는 그 이유가 젠이 정상적인 가족제도,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그 제도 밖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여러 번 딸아이를 떠올리며 남자와 여자의 물리적인 성생활, 그 사이에서만 얻을 수 있는 쾌락에 대해 말한다. 그것도 못 얻는 관계가 무슨 정상적인 관계냐고. 생명이 잉태될 수 없는 관계는 정상적일 수가 없다고. 어쩌면 정상의 부부관계 속에서 그것만 남아 있는 관계도 많을 텐데. 레인과 그린이 그것 말고 다른 모든 부분이 만족스럽다 해도 엄마는 한사코 그들을 비정상적인 관계라 못 박는다.

엄마는 비참한 젠의 모습이 동성을 사랑하는 딸아이가 도착할 마지막 지점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열렬히 딸아이를 정상으로 돌려놓고 싶었고, 젠의 손을 놓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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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엄마에게 말하게 했는가

이 이야기를 그린의 1인칭 시점에서 썼다면 어땠을까?

성소수자인 딸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와 갈등하는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방향이 독자가 감정 이입하기에 더 쉬웠을 수도 있다. 독자의 연령대를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 바카라을 읽는 반 이상이 그린과 비슷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일 테니.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라, 여자도 남자와 다르지 않다, 개인은 모두가 소중하다’고 배운 젊은이들. 독자는 비교적 쉽게 그린에게 감정 이입하고 엄마의 답답함을 비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쉬운 화자를 택하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혼이 났던 세대, 여자는 당연히 남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배웠던 세대, 집단이 개인보다 중요하다고 교육받았던 세대의 인물들 중 한 엄마를 화자로 삼는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다 보면 때때로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엄마는 어쩌면 저렇게 자신의 생각만 주장하는지, 한 번이라도 딸의 마음을 헤아려 볼 생각은 하지 못하는지, 내 딸도 아닌 타인인 레인에게 어떻게 그렇게 무례하게 굴 수 있는지.

그러나 독자는 답답한 지점이 온다고 해서 다른 시점으로 도망갈 수 없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독자는 계속 엄마의 생각 속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앞서 그린과 레인이 유난히 단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도 이 시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독자는 엄마가 흔들리는 순간마다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그린과 레인의 내면에는 들어갈 수 없다. 엄마의 눈에 비친 말과 행동으로만 두 사람을 짐작할 뿐이다. 레인이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침착하게 대답할 때 그 속에서 무엇이 무너졌는지, 그린이 엄마와 싸운 뒤 얼마나 아팠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엄마의 연약함은 속속들이 알지만 그린과 레인의 연약함은 상상해야 한다.

엄마의 시선을 보고, 그녀의 혼잣말을 들으며 독자는 조금씩 알게 된다. 엄마가 딸을 걱정하는 진짜 속내는 무엇인지, 왜 그토록 화를 내는지, 레인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들길래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건지. 젠을 버릴 수 없는 엄마의 마음과 딸에게 그토록 정상적인 삶을 강요하는 그 내면의 두려움과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화자의 딸인 그린은 어쩌면 독자가 알고 있는 엄마의 속내를 끝내 모를지도 모른다. 엄마의 속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는 오직 독자만이 알 수 있다. 엄마도 그린도 서로를 끝내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독자는 둘을,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독자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 자리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작가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성소수자를 이해해 달라는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다만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어쩌면 평생 겪어보지 못할, 또는 고민해 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 한 인간의 내면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그 속에서 몇 시간을 살게 한다. 엄마가 그린에게서 도망갈 수 없듯 독자도 엄마의 시선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

작가는 서사뿐만 아니라 형식을 통해서도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과연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무엇이 타인을 이해하게 만드는가?”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을까

소설은 단순히 ‘엄마가 마침내 딸의 동성애를 받아들였다’라는 결말을 내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는 끝까지 딸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소설은 엄마의 이해를 보여주는 대신 엄마의 행동을 보여준다.

이렇게 있어 줘서 고맙구나.
나는 간신히 입을 연다. 그 애는 다시 앉아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다.
나는 모르겠다. 너희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지, 살아생전에 그런 날이 올지.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잖니.
그러나 그런 기적이 오기도 전에 내가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지 않니. 그건 거짓말이니까. 내 딸을 포기하는 거니까. 떳떳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내 딸의 삶을 내가 놓아 버리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니.
멀리 도로에서 커다란 경적이 울린다. 소리는 순식간에 도로 저편으로 달아나 버린다. 그 애는 듣고만 있다. 그럼에도 노력해 보겠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엄마는 끝내 레인에게 ‘노력해 보겠다’고 말하지 못한다. ‘이해해 보겠다’고 다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더 이상 레인을 밀어내지 않고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이해하면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돌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순서를 흔들어 놓는 것 같다. 이유도 모른 채 일단 돌보게 되고, 돌보다 보면 그 속이 보이고, 보이면 조금씩 이해를 하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사랑, 그건 이해와 별개의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소설 속 엄마는 끝내 딸아이와 딸아이가 데려온 그 애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독자는 바카라을 덮으며 짐작한다. 언젠가 엄마도 거실에서 들려오는 그린과 레인의 웃음소리에 가만히 웃게 될지 모른다고.

‘딸에 대하여’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딸을 바라보는 엄마 자신에 대한 기록이다. 이해하는 세상만을 살고 싶었던 엄마가 비정상의 딸을 겪으며 세상은 이해할 일만 있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엄마의 혼잣말로 시작하고, 혼잣말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을 읽고, 시작을 다시 읽어 보니 마치 엄마는 달라진 게 거의 없는 것만 같다. 여전히 딸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 수월한 일상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싸우고 견디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것마저 자신 없어 하지만 그녀는 기운을 내기 위해 오늘의 잠을 잔다. 겉만 보아서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미세한 변화이다.

엄마는 말한다.
“나는 모르겠다. 내가 이해할 수 있을지.”

‘이해’라는 단어의 크기보다 훨씬 작고 미세한 변화. 작가는 어쩌면 그 정도의 움직임만으로도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일은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