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 전 일본 여행

by작은집

젠장, 당사자인 나에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내가 로버트라도 되는 줄 알아? 내가 인형이야?" 소리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이번엔 일본 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 여행 신청서에 제멋대로 사인을 한 거다. 날더러 지금 이 상황에 낯선 사람들과 여행을 다녀오라고? 매일 밤 혼자서 우는 나에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편안해지는지 몰라서 애가 타 죽겠는데.. 정신병원에라도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낯선 사람들 앞에서 반짝반짝 웃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여행을 주관하는 곳이 생판 모르는 남이라면 그나마 좀 좋게 볼 마음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내 염려를 해주었구나.' 생각했을 거란 뜻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엄마가 알고 지내는 교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였다. 대학생 전도를 위해 준비된 행사였는데, 내가 그 교회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엄마와 나를 아는 사람이 주관하는 행사였다. 엄마가 살고 있는 시에는 10개가 넘는 지부가 있고, 엄마를 모르는 목사님은 없었다. 엄마 얼굴에 먹칠하는 짓을 했다가는 두고두고 얼굴을 나들고 다니기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란 뜻이다.


'엄마는 언제나 이딴 식이야' 나의 절규가 그녀에겐 조금도 가 닿지 않는다.


"가기 싫어요."


그녀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청서에 서명을 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나의 거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거부는 그녀의 참고 목록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떤 크기의 감동이 돌아올까만 머릿속에 들어있었겠지?


"왜?"

잠시 두 사람의 침묵이 이어졌다.


"왜 안 가는데? 뭐가 싫어?"

"여행 가기 싫어요."

"교회에서 하는 거니까 괜찮아. 친구도 사귀고 좋잖아. 바람도 쐬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학교 소풍도 맘대로 몬갔다. 가고 싶은데 엄마가 일 하라고 소풍을 안 보내줘서 못 갔어.

니는 와 보내줘도 싫다 카노?"






여행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여행 참석자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다. 여행안내를 들으며, 머릿속에선 온통 '가지 않겠다는 말을 언제 꺼내야 할까?'에 대해 생각했다. 참가 취소를 해달라는 말을 하려고 몇 번이나 그를 바라보았으나,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하는 걸 말하는 일은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돌아오고 나서도 내내

언제, 어떤 식으로 탈출해야 할까에 대해 궁리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 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부산까지 가는 동안 두 번은 휴게소에 들를 것이다. 휴게소에서 탈출할까? 배를 안 타고 도망치면 어떻게 될까? 온갖 공상을 했으나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한 채 후쿠오카로 향하는 배를 탔다.

저녁에 출발해서 아침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삼등석이 우리가 배정받은 자리였다. 갑판으로 나와 밤하늘을 바라보며 울었다. 일본의 숙소에서도 나는 다시 울었다.






여행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땅을 경험했던 것이다.


내 눈에 비친 일본은 아기자기한 나라였다.

교회에서 한국은 아버지의 나라,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라고 배웠는데

일본의 정갈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내겐 가르침이 옳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배 안에서 먹었던 낫토와 미소시루는 맛없는 음식을 먹는 일본사람을 가엾게 여기게 해 주었고,

아소의 화산,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하우스텐보스 같은 관광지도 둘러봤다.


그러나 일본에서 가장 기뻤던 것은

마지막 날 잡화점에서 작은 화분을 하나 고른 일이었다.

가진 돈이 얼마 없었던 나는 선물 가게에서 선뜻 물건을 고르지 못했다.

분명 얼마간의 돈은 쥐고 있었는데도, 쉽사리 돈을 쓸 수 없었다.

고심 끝에 200엔을 주고 작은 화분 하나를 골랐다.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핑크 점박이 무늬의 싱고니움.

지금은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엔 처음 보는 식물이었다.

그 예쁜 식물을 한국으로 데려가게 된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출국수속에서 압수당했지만 말이다 ^^;;


돌아오는 배 위에서 멀어지는 일본을 보며, 나는 일본에게 말했다.

일본은 내가 배운 대로 여성스럽고 예쁜 나라였다고. 좋은 마음으로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그리고 지금 일본에서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