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단상, 상추

by흔적


제로웨이스트는 0의 상태를 의미하는 ‘제로(zero)’와 낭비를 뜻하는 ‘웨이스트(waste)’가 합쳐져 탄생된 말이다. 사람들은 쓰레기를 전혀 만들지 않는 생활 방식이라고 여겨 부담을 갖지만, 사실 본질은 ‘쓰레기(trash)’가 아닌 ‘낭비(waste)’에 맞춰져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제로웨이스트’가 아닌 ‘제로트래쉬’가 되었어야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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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인간이 살면서 쓰레기를 단 한 개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시는 물론이고 시골에서 채소를 직접 길러 먹는 전원생활을 하더라도 쓰레기는 나온다. 현대 문명에 조금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원주민이라면 모를까. 마트에서 장을 보고, 커피를 마시고, 옷을 사는 등 일상적인 도심 생활자에게 쓰레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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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한다는 건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완벽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실천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모순을 마주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선택권이 없어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사람 즉, ‘제로웨이스터’도 쓰레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삶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놔버리지 않는 것처럼 어설프고 부족한 상태를 끝없이 마주하며 수정해 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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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물건을 소비할 때의 기준은 가격, 품질, 외모, 생산지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제로웨이스터에겐 몇 가지 기준이 더 있다. 오래 쓸 수 있는 것인가, 건강에 유해하지 않은가, 버릴 때 분리배출이 잘 되나, 포장이 친환경적인가 등등. 왜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무심코 소비하는 수많은 물건들에는 사람들의 선택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 선택들은 환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누군가의 노동력을 불법적으로 착취할 뿐 아니라, 바카라임을 외부화하는 슬롯의 시스템까지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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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의 쓰레기로부터 파생되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의 소비 심리, 경제적 상황, 선택의 기준, 주어진 환경 등 많은 이유들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게 될 거라고 예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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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 이야기, 상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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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또 저녁에 상추 비빔밥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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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가 즐겨 먹는 음식은 상추 비빔밥이다. 밥에 상추, 버터, 간장, 깨를 넣고 비벼주면 너무 맛있다고 두 그릇씩 먹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초록 채소를 먹겠다는데 마다할 부모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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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를 사러 마트에 갔다. 평소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두레생협에서 주로 장을 보는데, 바쁠 땐 집 앞 마트도 종종 이용하는 편이다. 아이를 데리러 가기 직전까지 바카라상 앞에 앉아있었던 터라, 서둘러 집 앞 마트에 상추를 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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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참을 고르지 못하고 서있어야 했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투명한 비닐 포장 정도는 일반적인 거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데, 투명 플라스틱 트레이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비닐 포장 안에 투명 플라스틱 트레이 안에 상추가 들어있었던 거다. 순간 ‘이렇게까지 포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닐 포장만 간단하게 해서 판매하는 마트도 많은데, 하필 우리 집 앞 마트의 채소들이 전부 과대포장이라니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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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별로 3가지 상추가 트레이 안에 담겨 일렬로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로메인 상추를 발견했다. 그 상추는 투명 플라스틱 트레이 없이 비닐봉지에 들어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고르려는

순간 갈등이 시작되었다. 유기농, 무농약, GAP 인증이 전혀 없었다. 플라스틱 트레이가 있는 무농약 인증 상추와 플라스틱 트레이가 없고 아무런 인증이 없는 상추 중 무엇을 골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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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채소를 100% 다 유기농으로 먹지는 않지만, 나름의 기준을 세워둔 것이 있다. 껍질을 벗겨 먹는 과일이나 익혀서 조리하는 감자, 고구마, 호박 같은 채소는 인증이 없는 것도 국내산이면 산다. 물로 씻어서 바로 먹는 생채소는 되도록 무농약이나 유기농을 고른다. 쓰레기만 고려한다면 당연히 트레이가 없는 것을 고르겠지만, 아이와 함께 먹는 것이니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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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플라스틱 트레이가 있는 무농약 모듬쌈을 골랐다.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한다는 나의 선택인 것이다. 이것으로서 나는 플라스틱 트레이 하나를 더 구매한 소비자가 되었다. 약간의 죄바카라감과 함께. 내가 내 돈을 내고 포장에 쓰여있는 대로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 채소를 샀음에도 내게는 일말의 찝찝함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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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현실이다. 선택권이 없다는 것. 피할 길도 없다는 것. 시간을 쪼개 두레생협까지 다녀오지 못한 나를 탓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마트에서 나와 길을 걸어가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아이가 상추를 좋아한다면 직접 키워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생각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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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그토록 원하던 상추 비빔밥이 완성되었다. 아이가 잘 먹으니 뿌듯하고 나도 덩달아 채소를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이에겐 향이 강하지 않은 꽃상추와 청상추를 골라주고 나는 향이 강하고 비교적 질긴 깻잎과 케일로 비빔밥을 만들었다. 채소의 양이 많아서 최소 3-4번은 더 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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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채소를 씻어서 스테인리스 밀폐 용기에 옮겨 담은 후 배출한 쓰레기의 종류는 총 2개. 비닐봉지 1개와 그 안에 투명 플라스틱 트레이 1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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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의 목적은 잎이 연한 채소의 모양을 잡아주고 덜 무르게 하기 위함이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닐봉지 안에서도 충분히 싱싱함을 유지하는 상추들도 분명히 있다. 오랫동안 썩지 않을 플라스틱 트레이가 환경에 미치는 정도와 상추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효과를 비교한다면 어떤 게 더 가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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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번에도 같은 선택을 할까. 아마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웬만하면 두레생협을 갈 것 같고 그게 안된다면 또 같은 선택을 하겠지. 아이와 함께 먹는 게 아니라면 인증이 없는 상추를 선택할 것 같다. 물론, 아이가 먹는 음식들에 대해 ‘유기농이 아니면 절대 먹이지 않겠어!’라는 마음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매번 다 따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택이 가능하다면 되도록 유기농, 아니면 무농약, 아니면 GAP 순으로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지난달에 다녀온 가족 여행에서는 현지 마트에서 비닐을 쓰지 않기 위해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상추를 밀폐용기에 담아서 사기도 했다. 인증 따위는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선택권이 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맞춰 조절하고 선택할 수 있을 땐 기준을 분명히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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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트레이는 분리배출 표시에 PET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보통 생수병을 제외한 투명 과일팩이나 카페 일회용 컵은 다른 재질의 플라스틱이 섞여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아 분리배출할 때 ‘PET’가 아닌 ‘플라스틱’ 수거함에 넣어야 한다. 이 트레이는 따로 표시가 되어 있으니 안심하고 PET 수거함에 넣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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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민은 깊었지만 이왕 산 거 신선한 채소를 매일같이 맛있게 먹고 있다. 아이는 매 귀마다 상추 비빔밥을 해달라고 해서 덕분에 메뉴 고민이 사라졌다. 어릴 때부터 채소를 열심히 먹이려고 노력했는데 다행히 타고난 먹성으로 뭐든 잘 먹는 어린이가 되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상추는 얼마든지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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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아이가 물었다.

“엄마, 아직 상추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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