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검도는 왜 하는건데

by아나타

어릴 적 봤던, 90년대 드라마들. 극 중 인물들은 일이든 사랑이든,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검도나 스쿼시 같은 운동을 했다.

호구를 착용한 두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상대를 향해 죽도를 휘두르며 빠르게 다가간다. 반짝이는 마룻바닥, 큰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 높은 층고, 절제된 도복. 격한 겨루기 끝에 호면을 벗으면, 촉촉하게 젖은 고뇌에 찬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들은 하얀 벽을 마주 보고는 그 벽에 맞고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작은 공을 매섭게 쳐댔다. 공의 타격 소리, 코트 바닥과 신발 밑창이 만들어내는 마찰음은 한데 어우러져 어떤 쾌감마저 주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호흡을 몰아쉬던 주인공이 언제나 바닥에 드러눕는 것으로 그 씬은 완성되었다.

힘들다고 강변을 무작정 달리는 게 아니라 정해진 옷을 입고, 도구를 갖추고, 특정한 공간에서만 하는, 룰이 있는 운동들이었다. 나와는 너무나 멀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 모습들은 어린 마음에 묘한 흔적을 남겼다.

중학교 때 친해진 친구가 초등학교 때부터 검도를 해왔다고 했다. 가기 싫다고 투정부리는 그 친구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검도에는 돈이 많이 드는구나. 나는 할 수 없는 운동이겠구나. (비싼데 계속 빠진다고 친구 엄마가 친구를 혼낸 이야기였다)


작년 겨울, 작은 사고로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새 동네로 이사 와 줄곧 해오던 웨이트를 쉬게 되었다. 추운 겨울, 운동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기 귀찮아 미적거리는 사이 봄이 왔다. 풀린 날씨는 몸을 다시 움직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고 운동도 뭔가 새로운 걸 하고 싶어졌다. 집 근처에서 할 만한 게 있을까 이것저것 검색해보다 문득, 나의 해마 어딘가에 있던 '검도'가 반짝하고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검도관이 있나? 별생각 없이 검색을 해보는데 지근거리에 검도관이 떡하니 있었다. 심지어 늘 다녔던 길인데 있는 줄도 몰랐다.


검도라.... 아, 이제는 내가 뭔가를 한다고 할 때 말리거나 싫어할 사람이 없구나. 연초에 시작한 프로젝트로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새삼스런 자유와 잔고의 여유에 은밀한 기쁨을 느끼며, 그렇게 나는 검도인이 되었다.

이제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한 검도는 어린 시절과 비교해 그 위상이 많이 달라졌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한 쇠락한 시설의 동네 검도장은 그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검도복을 입는 것부터 죽도를 잡는 방법, 매일 해야 하는 기본기 연습에 처음인 티를 고스란히 내며 잡히는 손과 발바닥의 물집. 모든 게 낯설고 어려웠다. 하지만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서 조금씩 익숙해지는 느낌과 점점 꼿꼿해지는 자세, 몸을 드러내지 않는 정돈된 도복 등은 썩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검도는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많은데 108배와 대형견 산바카라으로 길러온 덕인지 체력이 좋다는 이야기를 수시로 들었다. 처음인데도 자세가 좋다고 해주시는 칭찬 역시, 주 3-4회 도장을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3개월을 채워가던 어느 날 호구 세트를 사도 되겠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호구라 하면 머리에 쓰는 호면, 손에 끼우는 호완, 가슴을 보호하는 갑, 허리에 차는 갑상, 이렇게 4종 세트를 말한다. 이 장비들을 착용해야 그때부터 실제 상대가 있는 대련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호구는 그 무게의 합이 4kg은 넘었고 착용하고 나자 숨을 쉬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펴졌던 어깨와 허리는 불 위의 오징어처럼 다시 말렸고, 그동안 반복해서 다졌던 기본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잘못된 동작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혼자 죽도를 휘두르며 타이어를 칠 때와 상대가 앞에 있을 때가 완전히 달랐다. 나의 부족함이 상대에게 폐가 된다는 생각이 자꾸 올라왔다. 나와 대련하는 시간이 저 사람에게도 연습이 되는 걸까. 내가 너무 못해서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건 아닐까.

탈곡기에 탈탈 털린 곡식마냥, 집으로 겨우겨우 걸어가면서 결국 이런 생각에 다다랐다.

나는 이걸 대체 왜 하는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니, 누군가의 머리를 쪼개거나 손목을 날리거나 허리를 가르는 등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이 검술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침마다 나와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자애명상을 하는 사람인데... 이게 맞는 걸까.


마침 가족여행과 출장이 있었다. 그리고 호구를 착용하는 일이 끔찍할 정도로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 달 조금 넘게 검도를 쉬었다. 검도관 단톡방에 쌓이는 이야기가 많아지고 쉬는 마음이 점점 불편해질 때쯤, 일단은 다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를 도장으로 돌려보낸 것은 건강도, 끈기도, 검도에 대한 애정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호구에 너무 많은 돈을 태웠다는 사실이었다. 어릴 적엔 돈이 많이 들어서 시작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돈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만두지 못했다.


8월 말 다시 나간 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대체 검도를 왜 하시나요?

다양한 대답이 있었다. 기본기는 싫은데 대련은 재미있다 같은 나와는 정반대인 사람부터 소리를 지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사람, 호신술 개념으로 배운다는 사람, 힘들지만 잘하고 싶다는 사람까지. 그러다 꽤 오래 다녔던 여성 검우의 대답이 마음에 남았다. 처음엔 힘들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 안 되던 게 되니 재밌어졌다고.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언젠가 집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호구를 가리키며 '예전에 잠깐 검도를 했었어,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이런 얘기를 하는 나를 상상했다. 그리곤 '처음엔 힘들기만 했는데....'에서 끝내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검도가 싫어진 걸까. 아니면 검도를 못하는 내가 싫어진 걸까.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호구를 쓰고 상대 앞에서 못하는 모습이 드러나자 검도가 재미없어진 거다. 잘한다는 얘길 들을 땐 신나게 하다가, 아직 갈 길이 구만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전의를 상실한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그나마 글쓰기를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건, 잘 써야 한다는 마음을 진작에 내려놓고 그저 쓴다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데 검도에서 또다시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숨기고 나와는 맞네 안 맞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달았다고 검도가 갑자기 재미있어지지는 않았다. 9월에도 가기 싫다, 가기 싫다 노래를 부르며 꾸역꾸역 검도관에 나갔다. 다만 대련 중 어느 찰나의 순간, 어쩌면 이런 부분이 재미있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 시작했다. 체력이 바닥나서 자세도 제대로 안 나올 때 한 번 더 기합을 내지르며 상대에게 달려가는 순간, 약간의 카타르시스가 따랐던 것이다.

당분간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대체 왜 검도를 하는 건지는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물을 틀면 아래로 흐르듯이 집에서 검도관으로, 일단은 그렇게 흘러가보기로 했다.

물론 가기 싫다는 노래는 여전히 흥얼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