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의 가을, 엘도라도

by홍길동

그해의 가을, 엘도라도


상점가의 가을은 시끌벅적하고 진득하다. 진한 참기름 냄새와 매콤한 김치 양념 향이 뒤섞인 골목을 헤치며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 시장 모퉁이 청과물점 가판대에 얌전하게 놓인 분홍빛 복숭아를 본다. 뽀얀 피부를 매끄럽게 깎아놓은 듯한 여름 복숭아들은 참 고와서 도리어 비현실적이다. 나는 그 보송보송한 표면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서른 무렵의 여름은 눈이 시리도록 뜨거웠다. 복숭아 농사는 봄철 곁가지를 솎아내고 꽃을 따주는 적화 작업부터가 고된 노동의 서막이었다. 한 가지에 수없이 돋아나는 꽃눈 중 가장 실한 녀석 하나만 남기고 손끝으로 쳐내다 보면, 손톱 밑은 온통 거뭇한 풀독으로 물들었다. 유월이 오면 아기 주먹만 한 초록빛 열매마다 일일이 종이봉지를 씌우는 적과 작업이 이어졌다. 뙤약볕 아래서 고개를 쳐들고 하루에 수천 번씩 봉지를 싸매다 보면 목덜미가 타들어 가고 어깨는 끊어질 듯 아파왔다. 그 뙤약볕 아래서 온몸이 땀과 복숭아털로 범벅이 된 채 삼켜내던 갈증은, 오직 달콤한 수확만을 바라보게 하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칠팔월의 조생종 백도들이 말랑하고 하얀 속살을 터뜨리며 한바탕 축제처럼 시장을 휩쓸고 지나가면, 과수원은 일순 적막에 싸였다. 다른 농가들이 수확의 기쁨을 정산하고 가지를 비워낼 때, 빈 과수원을 홀로 지키며 묵묵히 늦여름의 폭염과 초가을 찬바람을 맞이하던 나무가 있었다. 엘바도. 이 이국적인 이름의 만생종 황도는 남들이 은퇴를 준비하는 구월 중순에야 비로소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백도들이 물러 터질 듯한 과즙을 뽐내며 사라질 때도, 엘바도는 단단하고 푸르스름한 껍질 속에 자신의 본색을 꼭꼭 숨겨둔 채 고독하게 매달려 있었다.


복숭아 농사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은 언제나 구월의 가을 태풍이었다. 다른 과일들은 이미 수확을 끝냈지만, 엘바도는 가장 바람이 매서운 철에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야속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면 방 안에서 한숨을 쉬며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다음 날 새벽, 과수원에 가보면 어김없이 수십 개의 엘바도가 진흙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낙과는 이미 상품성을 잃은 고달픈 청춘의 잔해였다. 태풍을 이겨내고 가지 끝에 굳건히 살아남은 녀석들을 수확하는 날은 눈물이 날 만큼 감격스러웠다. 선별기 앞에 앉아 크기별로 단단한 엘바도를 골라내어 종이상자에 담는 손길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행여나 그 고운 황금빛 살결에 멍이라도 들까 봐, 복숭아 크기에 딱 맞춘 하얀 그물망 난좌를 상자 바닥에 깔고 알알이 폭신하게 들어앉혔다. 폭신한 집을 얻은 엘바도들이 상자 가득 오순도순 모여 앉아 부드러운 단향을 뿜어낼 때, 비로소 길었던 한 해 농사의 고단함이 하얗게 씻겨 내려갔다. 포장을 마치면 상자 옆면에 큼지막하게 복숭아 개수와 무게를 적어 넣었다. 정성스레 써 내려간 그 숫자를 보며, 나는 한 해 수확의 묵직한 성적표를 받아든 것처럼 가슴이 뿌듯하게 부풀어 오르곤 했다.


엘바도는 참 묘한 복숭아다. 한 나무에서 자라나 같은 상자 안으로 들어왔어도 저마다의 속도가 달랐다. 나뭇가지 위쪽에서 뜨거운 햇빛을 온몸으로 듬뿍 받은 녀석들은 먼저 발갛게 익어 말랑했고, 잎사귀 그늘 아래 숨어 숨을 고르던 아래쪽 녀석들이나 늦깎이들은 여전히 돌처럼 단단했다. 한 상자를 사도 두 가지 상반된 식감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엘바도만의 특권이었다. 그래서 엘바도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상자를 열자마자 단단한 녀석부터 와작 베어 물어 아삭함을 즐기고, 남은 것들은 베란다 그늘에 며칠 묵혀두었다가 손끝이 푹 들어갈 만큼 물렁해졌을 때 꿀 같은 단맛을 뚝뚝 떨어뜨리며 즐기곤 했다. 기다림마저 맛으로 승화시키는 과일, 그것이 엘바도였다. 그렇게 찬 이슬과 매서운 가을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낸 엘바도는 마침내 마법처럼 변했다. 서리를 맞으며 속을 졸이던 복숭아가 마침내 노란 빛을 뿜어낼 때, 조심스레 과도를 밀어 넣으면 서걱, 하고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는 과육이 잘려 나갔다. 한 입 베어 물면 와작, 하는 소리와 함께 걸쭉하고 묵직한 황금빛 과즙이 입안 가득 흘러내렸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진하고 새콤달콤한 향은, 여름날의 땀방울과 상자 가득 채워지던 수확의 기쁨까지 한데 녹아든 인생의 훈장이었다.


이곳 상점가의 시끄러운 사투리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남는 일은 가을 태풍보다 가혹했다. 세상이라는 커다란 선별기 앞에서 나는 아무런 숫자도 채우지 못한 채 빈 상자처럼 이방인이라는 변두리로 밀려난 것만 같아 남몰래 속을 끓이기도 했다. 그러나 석양빛이 길게 드리운 가판대 위에서, 늦가을의 매서운 서리를 견디며 기어이 황금빛으로 영근 과일을 마주한 순간 마음에 고요한 균열이 일었다. 한 상자 안에서도 햇살의 양에 따라 익어가는 속도가 다르듯, 인생의 행로 역시 저마다의 속도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늦게 익는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며칠 더 묵혀둔 엘바도가 마침내 무르익었을 때 비교할 수 없는 향과 진한 과즙을 터뜨리듯, 나 역시 두 개의 대지를 거치며 더 깊고 묵직한 인생의 단맛을 품어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다져진 내 삶의 궤적은 상자 속 하얀 그물망에 소중히 담기던 엘바도의 치밀한 과육처럼 단단해졌다.


상점가의 소란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을 하늘 위로 과수원의 노랗게 익어가는 저녁노을이 겹쳐 흐른다. 남들보다 늦게 익으면 어떠랴. 내 인생의 만생종, 엘바도의 계절은 이제 막 가장 달콤한 향기를 품은 채 비로소 영글어가고 있다.


image_b20f73d4.jpg








작가의 이전글기적 같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