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위한 전앞후

냉장고 앞에서

by지니샘

_전

보자, 나한테 뭐가 있었지? 얼마전 어머니, 아버지가 챙겨주신 채소와 반찬이 한가득 냉장고에 들어찼다. 흙이 묻어 샤워가 필요한 당근, 그냥 먹는게 제일 좋은 오이, 몰랑 몰랑 뭐든 될 수 있는 가지, 추운 겨울을 실감하게 하는 귤, 한 소쿠리 사과와 키위, 오늘 내일 안먹으면 물러지는 방울토마토, 딱딱한 겉보다 속이 옹골찬 외유내강 아보카도, 고향에서 못 먹고 내려와 윗 공기까지 맡아버린 유부, 매콤달콤하게 무쳐준 어머니표 일미, 나는 보내달란 말은 안했는데 먹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들어간 부추김치, 언젠가 보내주신 파김치, 몇달째 빛을 못 보고 있는 김치 한 포기. 상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나를 생각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 냉장고가 아닌 내 마음을 채워 혼자 사는 집이지만 외롭지 않게 해준다. 이제 필요한 건 뭐다? 시간! 여유로운 시간만 있다면 달달 볶아, 팔팔 끓여, 폴폴 데쳐, 쿨쿨 삶아 뭐든 해먹기 가능이다!


_앞

지금 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나는 뭘 먹고 싶지? 나가려면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게 뭐지?

나는 무엇보다 밥을 먹고 싶지만 너무 많이 먹어서 더부룩하고 싶지는 않아. 1시간 뒤에 나가야 하니 큰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음식을 간단하게 해먹어야 해. 아보카도 자를 수 있고, 치우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아. 아보카도는 뭐랑 먹어야 하지? 밥이랑 비벼? 밥이랑 아보카도만 먹으면 느끼하지 않아? 그럼 부추김치? 부추김치 그냥 먹을 수 있어? 들기름 넣는거 괜찮아? 아보카도랑 잘 어울릴까? 다른건 없나? 아보카도랑 참치도 괜찮고! 찬장에 참치 있고, 짭잘한, 김! 김이 있다! 김을 먹어! 김으로 싸먹어! 밥이랑 아보카도 비벼서 김으로 싸먹으면 준비할거 밥 데우기, 아보카도 자르기 끝! 채소 안먹어도 괜찮겠어? 무엇보다 느끼할걸? 그럼 방울토마토도 먹자. 방울토마토와 부드러운 아보카도가 만나 상큼하게 입을 씻어줄거야. 그럼 아보카도, 들기름, 참깨, 밥, 방울토마토 꺼내자! 답하자마자 사실은 답하는 사이에 손은 냉장고 문을 당긴다. 차갑기 보다는 시원한, 집에서 유일한 온도를 느끼며 손을 뻗어 상상 속 재료들을 선택한다. 하면서 괜히 오이도 한 번 쳐다보았다가 당근도 쳐다보았다가 한다. 시간이 더 있을 때 너희들을 더 맛있게 먹어줄게. 플라스틱 통에서 몇 개만 꺼내 다시 넣을 방울토마토를 위해 다리로 문을 공긴다. 하나, 둘, 셋, 네엣.... 다섯 할까 말까, 하는 사이에 삐삐삐 냉장고가 나를 채근한다. 아아 알겠어, 알겠다고. 다섯까지 하자! 아슬아슬 올라간 방울토마토 산을 보며 귀여워 하다 탁 하는 소리로 플라스틱통을 닫고 곧, 냉장고 문이 닫힌다. 빼먹은 들기름, 참깨에 “아!” 소리를 한 번 내질러 주고 한 번 더 전기가 만들어낸 오묘한 온도의 바람을 느끼며 먹을 준비를 마친다.


_후

방울토마토와 함께 먹을 아보카도 그릇을 꺼내기도 전에 방울토마토와 아보카드를 숟가락에 왕왕 올려 홀짝씩 다 먹어버렸다. 따끈하게 데운 밥에 냉장고 문 닫기 전 넣었던 들기름과 참깨 위에 숟가락으로 동그랗게 껍질을 도려내 까먹는 것부터 재미난 아보카도를 넣어 오늘 점심을 완성했다. 찬장에서 김 한 통을 꺼내 영상이 잘 보이는 쪽에 내려놓고 김을 뜯어 일단 쓰레기를 처리한다. 아보카도 껍질과 씨앗도 바짝 말릴 준비를 해놓고서야 냉장고 찬장에서부터 내 배로 들어갈 음식들을 마주한다. 곧 방울토마토와 만나게 해줄게. 또 한 가지 중요한 일로 생각을 잊게 할 영상을 고른다. 신나게 세팅해 놓으면 이제 정말 숟가락 들기! 쓱쓱 비벼 아보카도와 섞인 파스텔 연두 밥 한 숟갈, 두 숟갈, 세 숟갈, 네 숟갈, 남아있는 밥을 보니 탁탁 거리며 준비했던 시간보다 먹는 시간이 훨씬 짧다. 반비례한 시간이지만 모든 시간을 더한 만족감과 부른 배를 안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뱃 속에서 만난 음식들이 나름의 존재론적 의미를 찾았길 바라며. 이제 나는 망설임 없이 주방을 떠난다. 몇 시간 동안 냉장고 안을 상상할 일도, 냉장고 앞에서 한참을 생각할 일도, 냉장고 문에 손을 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잠시 동안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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