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 (2)

그가 머물던 자리

by하얀 나비

그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그 집에는 그의 기척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남은 것은 없었다.


가구는 원래부터 없었고, 그는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나갔다. 벽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빈집에 들어설 때 누군가 막 창가에 서 있다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들어와 있는 동안에는

평범한 거실조차 어딘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었다.


유나는 새 세입자를 구하기 위해 다시 아파트에 왔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밴쿠버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비는 오지 않았고, 대신 젖은 공기가 도시 전체에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창밖의 다운타운은 회색빛 유리처럼 흐릿했다.


아무도 없는 집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유나는 습관처럼 커튼을 반쯤 열었다. 낮은 구름 아래로 넘버원 하이웨이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바보 같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저 많은 차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집을 제대로 찾아간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개미들이 미로 같은 자기 집을 찾아가듯 단 한 사람도 성냥갑 쌓아놓은 것 같은 그 집이 그 집 같은 자기 집을 못 찾는 사람이 없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람 사는 모든게 작아 보이고 사는것이 개미와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저 풍경을 좋아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는 차분한 사람이었고, 늘 단정한 옷을 입었다. 아들과 함께 산다는 것. 한국에 가족이 있다는 것. 직업이 교사라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유나는 가끔 그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떠올리곤 했다.


창가 근처 바닥에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화분을 올려두었던 흔적 같았다. 처음 보는 자국인데 이상하게 그의 물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나는 괜히 손끝으로 그 둥근 자국을 한번 문질러보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아파트 매니저였다.


“오더 하신 Fob가 준비됐습니다”

“네 내려갈게요.”

“새 세입자 보러 오셨어요?”

“네.”

“전에 살던 분, 참 조용했죠.”

유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매일 아침 아이를 잘 챙겨주던 모습이 기억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좋은 아버지 같았어요.”

“세입자가 인물이 좋아서 배우인가 했습니다. 아내가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서요 하하.”


유나 또한 그를 지나치게 영화 속 사람처럼 생각해 왔는지도 몰랐다. 분위기와 얼굴과 말투만으로 만들어낸 이미지 속 인물처럼. 하지만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사람을 아주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접이식 낚시 의자에 앉아 미지근한 커피를 마셨다.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밴쿠버의 비는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지 않았다. 조용히 시작해서 오래 지속됐다. 유리창 위로 가느다란 빗물이 흘러내리며 도시의 불빛을 천천히 퍼뜨렸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새 세입자 와의 약속 시간은 아직 아니었다

유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인터폰 화면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이 화면 안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말했다.


“혹시 우편물이 온 게 있을까 해서요.”


유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그는 전과 다를 것 없이 단정했다. 짙은 회색 코트 어깨 위로 빗물이 조금 내려앉아 있었다.


유나는 현관 옆에 모아둔 우편물 중 그의 이름이 적힌 봉투 몇 개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는 봉투를 받아 들고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천천히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다리고 있었구나.

유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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