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나눔
오늘 교회 다락방 모임을 가졌습니다.
‘다락방’이라는 말은 참 정겹습니다. 옛날 집 안쪽에 있던 작은 공간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교회에서는 몇 사람이 모여 말씀을 나누고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며 함께 기도하는 작은 신앙공동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오늘도 교회 근처에서 다락방 식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쪽에 부딪히고 저쪽에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습니다. 누군가는 부모의 든든한 지원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길을 걸어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이것이 나의 자랑이다”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순장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살아오면서 이루어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작은 성공이라도 있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저는 특별히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제 인생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도 이르고 실패했다고 결론짓기에도 이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저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가정에서는 바카라임을 배우고, 슬롯에서는 질서를 배우고, 온라인 게임에서는 관계와 규율을 배웁니다. 사람과 부딪히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해를 받거나 갈등을 겪으며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인생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사람이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곡이 가득 찬 이삭일수록 아래로 내려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나님을 더 많이 안다고 할수록, 세상을 더 많이 경험했다고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사람은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 품을 수 있고, 자신의 말 한마디를 조심할 수 있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편 141:3)
옛날에는 적군이 오는지를 살피기 위해 높은 성벽 위에 파수꾼이 서 있었습니다.
멀리서 위험이 보이면 가장 먼저 알려야 했습니다.
봉화를 올리고 말을 달려 소식을 전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우리의 ‘입’에도 파수꾼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시대를 바라보는 파수꾼이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을 먼저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다락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다니엘의 세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 속에 던지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왕 앞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내실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의 절정은 그 다음 말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해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신앙의 본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시오.”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좋은 길을 열어 주십시오.”
물론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제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믿겠습니다.”
이것이 ‘그러지 아니할지라도’의 믿음입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러한 신앙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슬롯적인 불이익과 박해를 받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특히 네로 황제 시기와 그 이후 여러 황제들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았고, 수많은 신앙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 가운데서도 계속 전파되었습니다.
마침내 4세기 초에는 로마 제국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그 역사의 밑바닥에는 이름도 남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두려워 도망쳤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더 이상 하나의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살아 계신다.”
그것이 그들의 증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말씀처럼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어 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다락방은 무엇일까요.
저는 다락방이 단순히 성경 지식을 배우는 장소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곳입니다.
누군가는 성공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실패를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기쁨을 나누고 누군가는 상처를 내놓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생에는 수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부모와의 만남이 있고, 스승과의 만남이 있고, 친구와의 만남이 있고, 배우자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 모든 만남도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인생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달라집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 질문의 답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무엇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저를 만들어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딪히면서 배우고,
넘어지면서 배우고,
사람을 만나면서 배우고,
말씀 앞에서 다시 자신을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조금씩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되어 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 하나를 밝히는 사람.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는 사람.
그리고 상황이 좋을 때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풀무불 앞에서도 고백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오늘의 다락방은 바로 그 믿음을 다시 배우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의 거대한 다락방인지도 모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배웁니다.
오늘도 낮아집니다.
오늘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고백합니다.
**그러지 아니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