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과 사랑

기독교적인 가정의 모습이란

가정을 꾸리고 결혼생활을 하면서 내 자녀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장 먼저 만나는 세계는 부모의 품이다. 특히 아주 어린 시절, 한 살과 두 살, 세 살 무렵의 아이에게 누군가 자신을 안아주고 울음에 응답해 주고, 눈을 맞추고, 따뜻한 목소리로 불러주는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흔히 우리는 이것을 ‘엄마의 품’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역할이 반드시 어머니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아버지도 중요하고, 조부모나 다른 안정적인 보호자도 아이에게 깊은 사랑과 안전감을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돌보느냐보다 아이가 필요로 할 때 일관되게 반응해 주고,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래도 ‘엄마의 품’이라는 말에는 특별한 울림이 있다.

아이가 울 때 안아주고, 배고플 때 먹이고, 잠들지 못할 때 토닥이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의 표정 하나만 보고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려고 애쓰는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받고 보호받았다는 경험은 아이에게 세상을 믿어볼 만한 곳으로 느끼게 하는 하나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알아서 크겠지 하며 지나치게 방치한다면 아이가 정서적인 외로움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아이를 많이 안아주고 사랑했다고 해서 그 아이가 부모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부모가 빠지기 쉬운 가장 어려운 함정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사랑으로 시작했던 관계가 어느 순간 소유와 통제의 관계로 변할 수 있다.

부모는 아이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먹는지, 학교생활은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보호이고 사랑이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이는 부모에게서 독립해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가야 한다. 부모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부모가 선택하지 않았을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때 필요한 사랑은 붙잡는 사랑보다 놓아줄 줄 아는 사랑일 것이다.

성경에서도 자녀는 부모의 물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 시편 127편 3절

‘기업’이라는 말씀을 소유권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생명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맡겨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가 아니라 바카라임이다.

잘 먹이고, 잘 가르치고, 보호해 주고, 사랑해 주되 언젠가는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내주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내가 자녀를 낳아 잘 키울 수 있을까?’

자녀가 성장한 뒤 나를 존경할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자녀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한때는 차라리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완벽한 부모만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모도 자녀와 함께 성장한다.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아는 부모, 잘못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부모, 자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부모됨인지도 모른다.

결혼 역시 비슷하다.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한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감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바카라임과 인내와 신뢰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어 한 생명을 맞이하게 된다면 삶의 중심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과거에는 한 가정에서 자녀를 일곱, 여덟, 아홉 명씩 낳아 기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한두 명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조차 큰 결심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온라인 게임생활의 어려움도 있으며, 육아와 교육에 대한 부담도 크다.

맞벌이 부부라면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도 있고 조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 종일 한 사람이 옆에 붙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퇴근해서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

아이가 넘어졌을 때 먼저 안아주는 손.

실패했을 때 “괜찮아, 다시 해보자”고 말해주는 목소리.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오늘 하루 어땠느냐고 진심으로 물어보는 관심.

이런 작은 순간들이 쌓여 아이의 마음속에 부모라는 존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자녀가 성장하면 부모의 역할도 변해야 한다.

품 안의 아이였을 때에는 안아주어야 하지만, 걷기 시작하면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조금 더 크면 한 걸음 뒤에서 지켜봐야 한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도록 보내줘야 한다.

사랑의 모양이 계속 달라지는 것이다.

가장 좋은 부모는 자녀를 영원히 품 안에 가둬두는 부모가 아니라 언젠가는 품 밖으로 내보낼 줄 아는 부모가 아닐까.

최근 뉴스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벌어지는 극단적인 사건들을 접하면 마음이 무겁다.

가족은 가장 안전해야 할 관계인데 때로는 가장 깊은 상처가 발생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내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가 하나의 독립된 생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그 말씀을 가장 먼저 연습하는 장소가 가정일지도 모른다.

내 자녀를 귀하게 여기듯 다른 사람의 자녀도 귀하게 여기고, 내 가족의 아픔을 살피듯 이웃의 아픔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

가정에서 시작한 사랑이 이웃에게까지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를 잘 키운다는 것은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직업을 갖게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자신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며,

다른 사람의 생명 역시 귀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부모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존경할 수 있게 되는 것.

나는 그것이 부모에게 주어진 가장 아름다운 열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내 것이 아니다.

내게 잠시 맡겨진 하나의 귀한 생명이다.

어릴 때는 힘껏 품어주고,

자라면서는 손을 잡아주고,

성인이 되면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축복하며 보내주는 것.

어쩌면 부모의 사랑은

**품어주는 사랑에서 시작하여 놓아주는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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