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클레시아: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믿지않는자들을 교회라는 공간으로 불러들이
맛집은 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가?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맛있기 때문이다.
음식점의 건물이 조금 낡았어도, 주차장이 다소 불편해도, 식탁과 의자가 화려하지 않아도 음식이 맛있으면 사람들은 다시 찾아간다. 골목 깊숙한 곳에 숨어 있어도 사람들은 지도를 검색하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간판이 작고 실내 장식이 소박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음식의 맛이 다른 부족한 부분을 덮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청결과 친절, 안전과 정직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맛이 좋다는 이유로 모든 잘못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식점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결국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내어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음식이 맛있고 정성이 담겨 있다면 손님은 그 안에서 주인의 마음까지 느낀다.
가수도 마찬가지다. 의상이 조금 평범하고 말솜씨가 부족해도 노래를 잘하면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화려한 무대 장치가 없어도 진심을 담아 노래하면 청중은 감동한다. 뛰어난 노래는 겉으로 보이는 부족함을 넘어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그렇다면 사람의 삶에서 다른 부족함을 덮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맛’은 무엇일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사랑과 은혜다. 세상의 맛집이 좋은 음식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사람들을 불러들여야 한다. 교회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은 건물의 크기나 화려한 프로그램에만 있지 않다. 설교자의 유명세나 조직의 규모에도 있지 않다. 상처받은 사람이 위로받고,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나며, 배고픈 사람이 함께 먹고, 외로운 사람이 가족을 발견할 때 사람들은 그곳에서 복음의 참맛을 경험한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은 이러한 복음의 본질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 한자리에 앉으셨다. 그 식탁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만찬이 아니었다. 값비싼 음식이 차려진 왕의 잔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깊고 거룩한 식탁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지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뒤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또 잔을 가지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뒤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나누어 주신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다. 세상의 식탁은 가진 사람이 베푸는 자리일 수 있지만, 최후의 만찬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져오라고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떡을 떼어주셨다. 자격을 증명하라고 하시기 전에 잔을 건네셨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식탁에 완전한 사람만 앉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을 팔 유다도 있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베드로도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칠 제자들도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은 믿음이 완전한 사람도 아니었고, 용기가 충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서로 누가 더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기도 했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셨다. 그들의 연약함을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알고도 자리를 마련하셨다. 그들의 부족함을 정죄하는 것으로 마지막 시간을 채우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으로 만찬을 완성하셨다.
최후의 만찬이 우리를 불러들이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식탁에는 은혜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강한 사람만 환영받는 세상의 식탁과 달리, 예수님의 식탁에는 약한 사람도 앉을 자리가 있다. 성공한 사람뿐 아니라 실패한 사람도 초대받는다. 의로운 척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깨달은 사람도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의 식탁은 약한 사람을 쫓아내는 자리가 아니라 다시 일으키는 자리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도 씻어주셨다. 당시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 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신 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높은 분이 낮은 자리에 내려오셨고,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오히려 섬기셨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행정과 법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법은 질서를 유지하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하다. 법의 공정성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한다. 약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까지 무조건 허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법과 행정이 현실의 차이를 외면한 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바카라임만 요구한다면, 형식적으로는 평등해 보여도 실제로는 약한 사람에게 더 가혹해질 수 있다.
높은 문턱 앞에서 건강한 사람은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장애인이나 노인, 환자에게 같은 문턱은 거대한 장벽이 된다. 같은 서류를 요구해도 글을 읽기 어려운 사람이나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훨씬 무거운 부담이 된다. 같은 벌금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에게는 작은 불편이지만 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삶을 무너뜨리는 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약자를 위한 행정은 특혜가 아니라 현실적인 공정에 가깝다. 혼자 설 수 없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다시 걸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도움의 목적은 사람을 계속 의존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보호받는 위치에 영원히 머물게 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그를 평생 무능한 사람으로 남겨두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베드로가 훗날 다른 사람을 섬기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교육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약한 사람을 대신해서 모든 일을 해주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실패를 통과하게 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 자기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 보여주는 진정한 자립이다. 자립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사랑과 도움을 받아 회복된 사람이 이제 자신의 발로 걸으며 다른 사람의 손도 붙잡아주는 상태다.
맛집은 손님을 배부르게 한 뒤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낸다. 예수님의 식탁도 우리를 먹이고 세상으로 보낸다. 우리는 예배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맛보지만, 그 은혜를 혼자 간직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식탁에서 위로받았다면 세상에서 우는 사람을 위로해야 한다. 용서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도움을 받았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불러들이려면 먼저 복음의 참맛을 회복해야 한다. 사람을 외모와 재산, 학력과 지위로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며, 장애인과 노인, 이주민과 홀로 사는 사람도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맛집에 다녀온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그 집을 소개한다.
“그 집은 정말 맛있어.”
“조금 기다려도 먹어볼 만해.”
“다음에는 우리 함께 가자.”
복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분을 소개하고 싶어진다. 억지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맛본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그분이 나를 붙드셨다.”
“모든 사람이 나를 포기했을 때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니 당신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이러한 고백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가장 진실한 초대장이다.
맛집은 왜 우리를 불러들이는가? 맛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식탁은 왜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를 불러들이는가? 그곳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과 용서, 희생과 생명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지 않으셨다. 부족한 제자들을 자신의 식탁으로 부르셨고 떡과 잔을 나누셨다.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으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누군가의 흠집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길을 마련하는 삶이어야 한다. 행정과 법도 처벌과 배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정한 원칙을 지키면서도 약한 사람의 형편을 살피고, 회복과 자립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아직 빈자리가 있다. 그 자리는 힘센 사람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지친 사람, 실패한 사람, 가난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 다시 시작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자리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와서 먹으라.”
우리가 그 식탁에서 생명의 맛을 보았다면, 이제는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작은 식탁을 마련해야 한다.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고, 억울한 사람의 말을 들어주며, 넘어진 사람이 다시 설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때 세상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의 맛을 보게 될 것이다.
맛있는 음식이 사람을 다시 찾아오게 하듯, 진실한 사랑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거룩한 초대이며, 교회와 슬롯가 함께 회복해야 할 참된 식탁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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