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적군은 아군에게 패배를 주면서 힘과 기운을 빼앗는가

아트피셜 인델리전스 시대의 요나의 표적

왜 적군은 아군에게 패배를 주면서 힘과 기운을 빼앗는가?

아트피셜 인텔리전스 시대의 요나의 표적

적군이 아군에게 패배를 안기는 목적은 단순히 한 번의 전투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다. 패배를 반복해서 경험하게 함으로써 상대의 자신감과 판단력, 다시 일어설 의지까지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육체의 힘보다 먼저 마음의 기운을 빼앗는 것이 전쟁의 오래된 전략이다.


우리의 삶에도 이와 비슷한 순간이 찾아온다. 실패가 거듭되면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두려움 때문에 결정을 미루며, 결국 도전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진다. 오늘날에는 인공지능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이러한 불안이 더욱 커지고 있다. 내가 하던 일을 인공지능이 대신하고, 내가 어렵게 쌓은 지식과 기술이 순식간에 평범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한순간의 파도만으로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려도 쉽게 뽑히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 붙들린 삶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쳤다. 그가 탄 배는 거센 폭풍을 만났다. 요나는 자신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원들에게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했다. 그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성난 바다는 곧 잔잔해졌다.


요동하는 바다가 멈춘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배에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던 방향이 돌이켜졌기 때문이다. 삶의 풍랑 앞에서 우리는 먼저 “누가 나를 힘들게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때로는 “나는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것처럼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요나의 이야기는 단순한 생존의 기적이 아니다. 죽음과 같은 깊은 곳에 내려갔다가 다시 사명을 향해 일어서는 회복의 표적이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표적이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표적이 필요하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하고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슈퍼 에이전트’가 등장하더라도, 인간의 가치는 계산 능력이나 생산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수많은 정보를 분석하고 최적의 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최종적인 바카라임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다.


오늘날 경제적 이익은 인공지능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 기술이 얼마나 널리 확산되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거대한 플랫폼은 더 많은 이용자와 정보를 바탕으로 더욱 강력해지고, 작은 기업과 개인은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몸부림친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두려움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니느웨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인공지능을 경쟁자를 쓰러뜨리고 이익을 독점하는 도구로만 바라보는가? 아니면 사람을 살리고, 약한 이들을 돕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선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악한 인간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또한 성경은 부모가 자녀를 잊을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선포한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는 시편의 고백도 있다.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실패와 배신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자녀가 부모를 해치고, 부모가 자녀를 버리는 비극이 일어난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복잡하고 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은 선을 행할 가능성과 악에 빠질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다. 인공지능 역시 인간이 입력한 목적과 가치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의 존엄성과 일자리를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능력을 지닌다면 세상은 더 이상 인간다운 공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재능과 성품, 경험과 사명을 주셨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며, 그 차이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것이 공동체의 역할이다.


문민정부 시절 거세게 불었던 세계화의 바람은 이제 일시적인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국경을 넘어 사람과 자본, 기술과 문화가 실시간으로 이동한다. 인공지능은 이러한 지구촌을 더욱 촘촘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연결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적 연결이 깊어질수록 인간에게는 더 높은 신뢰와 바카라임, 절제와 사랑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80억 명이 함께 살아가는 이 지구촌은 천국인가, 지옥인가?


그 대답은 기술 자체에 있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떤 방향으로 기술을 사용하며,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수많은 사람이 모든 문제에서 완벽하게 의견을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동의 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거두었다. 만나는 하루치만 거두어야 했으며 욕심을 부려 쌓아둔 것은 썩고 벌레가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루하루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으로 이끄셨다.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에 들어간 힘은 인간의 기술이나 군사력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믿음이었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독점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오늘의 만나를 감사히 거두고, 필요한 것을 이웃과 나누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믿음이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속도를 높여줄 수 있지만 삶의 목적까지 정해주지는 못한다. 답을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어떤 답이 선하고 옳은지는 인간이 바카라임 있게 판단해야 한다.


적군이 우리의 힘과 기운을 빼앗으려 할 때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마음이다.

실패했다고 해서 사명이 끝난 것은 아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지만 버려지지 않았다.

큰 물고기의 배 속은 무덤처럼 어두운 곳이었지만 동시에 그를 다시 살리고 돌이키게 하는 은혜의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깊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도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우리를 붙드시며 다시 사명의 자리로 보내신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바카라임과 사명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요나의 표적은 우리에게 말한다.

죽음과 같은 절망 뒤에도 부활의 길이 있으며, 패배 뒤에도 다시 시작할 사명이 있고, 요동치는 바다 뒤에도 반드시 잔잔함이 찾아온다고.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두려움에 기운을 빼앗기지 말자.

도망치는 다시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니느웨를 바라보자.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만나를 거두며,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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