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정지 신호에 걸렸다. 앞을 바라보니 내 차 두 칸 앞에 서 있는 커다란 화물차 위에 까마귀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건축자재를 실었는지 쓰레기를 실었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랗고 지저분한 화물차. 그 위에 앉아 적재함 덮개 사이의 틈새를 유심히 살피는 커다랗고 시꺼먼 까마귀의 모습. 둘 다 흉물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무슨 재수 없는 일이라도 생기려나?’ 하지만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명상을 하다가 문득 까마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까치는 그렇게 좋아하면서 까마귀는 왜 그리 미워할까? 걔가 내게 해를 끼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없다. 그런데 왜? 원인은 하나. 크고 시꺼먼 징그러운 모습에 “까악~까악~” 하며 울어대는 듣기 싫은 목소리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먼 짐승을 미워해도 될까?
그런 생각과 동시에 '이들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파헤쳐 보았다. 그러자 지금껏 몰랐던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길조와 흉조, 그 엇갈린 시선
우리 민족에게 까치는 반가운 손님을 불러오는 '길조'의 상징이다. 아침 일찍 담장 위에서 까치가 울면 그날은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 믿으며 웃음 지었다. 반면 까마귀는 정반대의 대접을 받는다. 온몸을 뒤덮은 검은 깃털과 낮게 깔린 울음소리는 죽음이나 불운을 암시하는 '흉조'로 여겨졌으며, 까마귀가 울면 마을에 초상이나 악재가 생길까 전전긍긍했다.
이러한 극명한 대비는 동양의 설화와 민속 신앙에 뿌리 깊게 내려온 결과다. 까치는 견우와 직녀를 잇는 오작교를 만드는 선한 존재로 묘사된 반면, 까마귀는 시체를 먹는 습성 탓에 저승과 이승을 잇는 불길한 매개체로 낙인찍혔다. 결국 두 새에 대한 인간의 감정은 생물학적 실체보다는 그들이 상징하는 '이미지'에 의해 결정된 셈이다.
과연 누가 이로운 존재인가
그렇다면 실제로 까치는 인간에게 선한 일만 하고, 까마귀는 해만 끼칠까?
생태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오늘날 까치는 과수원의 과일을 파먹는 등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고, 나아가 전신주의 전선을 건드려 정전 사고를 일으키는 유해 조류로 분류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제주도다.
1989년 말, 한 언론사와 항공사가 창간 1주년 및 첫 제주 취항을 기념해 제주에는 없는 길조라며 육지에서 까치 60여 마리를 들여와 한라산 인근에 방사했다. 그러나 결과는 재앙에 가까웠다. 천적의 부재, 풍부한 먹이감, 따뜻한 기후가 겹치면서 까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그 결과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20년에는 약 10만 마리가 서식하게 되었고, 토착종인 까마귀를 밀어내고 작은 새와 양서류를 잡아먹으며 제주 고유의 생태계를 위협했다. 피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귤과 딸기 같은 농작물을 쪼아 먹어 매년 수억 원대의 경제적 손실을 입혔고 전신주에 둥지를 틀어 정전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급기야 제주시는 늘어난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 매년 2만여 마리를 포획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그에 반해 까마귀는 이로운 일을 많이 한다.
첫째, 까마귀는 생태계의 청소부 역할을 한다.
죽은 동물의 사체나 쓰레기를 먹어 치움으로써 질병 확산을 막고 환경을 정화하는 데 이바지한다.
둘째, 농업 생태계에서 ‘해충 조절자’ 역할도 한다.
까마귀는 잡식성이어서 곡물을 먹기도 하지만,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메뚜기, 거세미나방 애벌레, 쥐 같은 해충과 소형 설치류도 주된 먹이로 삼는다. 이는 농약 사용을 줄이면서도 농작물 피해를 덜어주는 자연적인 방제 효과를 가져온다.
셋째, 까마귀는 인간 대신 조림 사업도 한다.
까마귀는 나중에 먹으려고 여러 곳에 먹이를 묻어 두는데, 제아무리 영리한 까마귀라 해도 그 많은 곳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그렇게 잊혀진 씨앗과 견과류는 땅속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싹을 틔우면서 종자 산포의 역할을 하여 인위적인 조림 없이도 숲이 확장되고 유지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까마귀는 인간에게 효의 의미까지 일깨워준다.
새끼 까마귀는 다 자란 뒤 늙고 힘없어진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며 보살피는데 이를 보고 인간은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다. 새끼가 도리어 어미를 봉양하는 모습에서 참된 효의 의미를 읽어낸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이기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까마귀는 결코 하찮거나 미움받아 마땅한 새가 아니라 오히려 익조(益鳥) 중의 익조라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도 까마귀는 뭣 모르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미움을 받고 있으니 이런 억울할 데가...
인간 까치와 까마귀
이번에 까치와 까마귀의 본질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 자신 무척 부끄러웠고,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새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까치와 까마귀로 구분하진 않았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많은 경우 상대방의 본질은 잘 모른 채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목소리, 말투, 언변, 매너, 그리고 내 개인적 기호에 따라 판단하고 분류하며 대우해 온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슬롯에 나온 지 어언 47년, 교수 생활 35년.
그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사귀었고, 숱한 제자들이 나를 거쳐 갔다.
긴 세월이 흐른 지금, 그토록 아꼈던 많은 까치는 어디론가 날아가 연락조차 없고, 몇몇 까마귀는 끝까지 내 곁에 남아 어미 새 봉양하듯 나를 보살피며 나로 하여금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슬롯에서 사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30년 넘게 온갖 도움을 주며 애지중지 아꼈던 한 지인은
나의 간곡한 응원 부탁에 말로만 화답했을 뿐,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넓은 인맥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나는 그를 부탁 순번 맨 마지막에 놓고
부탁 다음 날부터 ‘구독’ 과 ‘좋아요’, 그리고 ‘조회수’ 상황을 매일매일 체크하고 기록했다.
그런 사실을 일 턱이 없는 그는 넉 달 뒤 예전과 다름없이 천연덕스럽게 환자 부탁을 해 왔다.
오랫동안 믿었던 '까치'가 하루아침에 배신의 '까마귀'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 반대의 상황도 벌어졌다.
그동안 고만고만한 사이를 유지해 왔던 사람들, 그래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그들이 보여준
진심 어린 응원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런 까치를 몰라본 내 눈을 부끄럽게 했다.
이제야 비로소 뼈저리게 느낀다.
사람의 됨됨이를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깃털이나 감미로운 목소리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하늘을 나는 새는 죽을 때까지 타고난 본성대로 살다 가지만,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어쩌면 그 역시, 깃털에 가려진 본성을 알아보지 못한 결과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