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형 개념의 확고한 이해가 '인간관계'를 바꾸는 출발점임을 자각하라!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엄중함을 놓치곤 한다.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질을 짚기 위해 두 개념을 정리해 보자.
(큰제목에서 유형가치, 무형가치를 띄어쓰기하지 않은 것은 제목 글자수 제한 때문임을 양해 바란다.)
※ 이 글의 이미지는 생성형 AI(제미나이)로 제작된 것임을 밝힙니다.
형이상학적 가치(무형 가치):
사랑·진리·공정·우정처럼 감각적 대상을 넘어
정신적·초월적 차원에서 삶의 의미와 지향점을 제공하는 가치다.
형이하학적 가치(유형 가치):
돈·물건·신체처럼 오감으로 느낄 수 있고 구체적인 형태를 지녀
물질적·실용적 욕구를 충족하는 가치다.
개념 자체는 명쾌하다. 누구나 머리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로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영화 〈곡성〉의 유명한 대사처럼,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뭣이 중한디?!"
우리는 살면서 무형의 가치를 유형의 가치보다 우습게, 혹은 얕보는 경향이 있다.
조금만 자신을 돌이켜보면 이 사실을 쉽게 인정하게 된다.
여기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자.
친구 A를 만나러 가는 길에 부주의로 휴대폰을 떨어뜨려 액정이 깨졌다.
며칠 뒤, 또 A를 만나러 가다가 이번에는 한눈을 팔다 발목을 삐었다.
이 순간, 인간의 뇌는 교묘한 방어기제를 가동한다.
'왜 A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이런 재수 없는 일이 생기지?'
내 부주의로 발생한 불행의 원인을 상관없는 친구에게 치환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위로하려는 태도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이성적이고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이들은 자기 부주의를 인정한다.
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 어리석은 기제에 휘둘린다.
필자가 제목에서 이를 '유전적 결함'이라 칭한 이유다.
선험적·태생적으로 우리 뇌에 각인된 미숙한 본능이라는 뜻이다.
편의상 이런 본능에 휘둘리는 이들을 '보통사람'이라 부르자.
보통사람은 휴대폰 수리비라는 물질적 손실과 발목의 통증이라는 신체적 피해의 원인을 A라는 친구와의 만남에 덮어씌운다. 그리하여 아무 죄 없는 '우정'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치에 금을 내기 시작한다.
처음 한 번은 우연이라 치더라도, 동일한 불운이 반복되면 보통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
당장 관계를 끊지는 못하더라도 약속 장소를 자신의 집 근처나 익숙한 곳으로 유도하며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만약 A가 눈치 없이 원래 만나던 중간 지점을 고집하면, 결국 둘 사이에 갈등이 터지고 우정은 깨진다.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보통사람의 속 좁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A의 잘못일까?
아니면 늘 만나던 장소를 고집한 A 때문에 불편해진 보통사람의 잘못일까?
이 갈등의 본질은 원인과 결과의 오매칭(Mis-matching)을 넘어선 곳에 있다.
애초에 물질적인 휴대폰 수리비나 당장의 신체적 고통을
'우정'이라는 무형의 가치보다 위에 두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다.
만약 깨진 것이 휴대폰 액정이 아니라 입에 물고 있던 알사탕이었다면 어땠을까?
발목을 삐었을 때 아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원한 자극으로 느껴졌다면 둘의 우정이 깨졌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토록 무형의 가치를 얕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무형의 것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회복되거나 대체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유형의 가치는 눈앞에서 파손되고 당장의 물리적 통증을 유발한다.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돈'과 '노력'이라는 외재적 자원을 즉각 투입해야 하기에 더 크게 두려워하고 억울해한다.
그러나 조금만 삶을 깊이 반조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얕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강력범죄 피해자나 유가족의 찢어진 심정이 과연 막대한 보상금으로 회복될 수 있는가?
어린 시절 강자(부모·교사·상사)로부터 받은 학대의 기억이,
먼 훗날 내가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힘을 가진다고 해서 깔끔히 씻겨 나가겠는가?
무형 가치의 훼손은 눈에 보이는 파편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우리 영혼과 뇌리에 깊은 흉터를 새긴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죽는 순간까지 불쑥불쑥 떠올라
삶을 괴롭히고 고통에 빠뜨린다.
반면 유형 가치의 훼손은 어떤가. 휴대폰은 새 모델로 바꾸면 그만이고,
발목 통증은 시간이 지나 뼈가 붙으면 사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언제 발목을 삐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것이 유형 가치의 손실이다.
이제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뭣이 중한디?!"
돈과 시간으로 어떻게든 복구할 수 있는 '유형의 가치'를 위해,
그 어떤 자원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무형의 가치'를 얼마나 쉽게 팽개치며 살아왔는지 말이다.
오늘, 친구 A를 만나러 가다 깨뜨린 휴대폰 액정의 금보다,
그 짜증 때문에 금이 가고 있는 친구와의 '우정'의 무게가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러한 ‘본능적 착각’과 무형 가치의 경시는 비단 친구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목격하는 수많은 관계의 비극 역시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정에서: 밖에서 온라인 게임 상사에게 부당한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정작 집에서는 자신을 반기는 아내와 어린 자식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쏟아붓는다.
학교에서: 교사가 자신이 겪은 개인적인 스트레스와 짜증을 제어하지 못한 채, 교실 안의 무고한 학생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분풀이를 해댄다.
친구 관계에서: 집에서 부모에게 혼난 아이가 그 억울함과 분노를 학교로 가져와, 자신보다 순한 친구를 괴롭히고 괴롭힘의 주동자가 된다.
온라인 게임에서: 권력을 쥔 상사가 후배의 공을 뻔뻔하게 가로채고, 반대로 자신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힘없는 아랫사람에게 억울하게 뒤집어씌운다.
왜 이런 불합리한 일들이 우리 슬롯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흔하게 관찰되는 것일까?
약자는 당장 자신에게 대항할 힘이 없다는
‘유형적 우위’를 확인했기 때문이며,
'나중에 맛있는 것을 사주거나 조금 잘해주면 금방 풀릴 것'이라는
오만하고 착각에 찬 계산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하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약자가 대항하지 않은 것은
그 행동이 옳아서가 아니라, 참아내고 있었을 뿐이다.
나중에 잘해주면 풀릴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야말로,
인간관계의 무형 가치를 가장 얕보는 최악의 유전적 결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