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삼층밥

오싹 달싹 넘어간다

by이미경

11살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 언니, 쌀 한 됫박 묵은 김치 1통, 달랑 둘러메고 자취방으로 떠나버렸다.

6남매 중 동생과 둘이 남았다.

집이 휑했다.


그 해 유달리 보릿고개 소쩍새가 슬피 울어 됐다.

큰길가 버스정류장에서 서른 걸음 남짓, 오가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쉬어가던 집.

'방앗간 아재가 셈을 잘못했나?' 엊그제 찧어다 놓은 뒤주 쌀이 푹푹 까바졌다.

곳간 사정은 개의치 않고 파젯날 동네 사람들을 청해 아침밥을 융숭히 대접해야 한다는 아버지와

이번에는 그냥 넘기자는 엄마 간에 옥신각신 말다툼이 벌어졌다.

고함 한 번으로 논밭을 갈아엎는 아버지를 누가 맞서랴.

3대 봉제사를 지내는 엄마의 헬간 얼굴에 한숨 배인 수심이 짙게 드리웠다.


저녁상을 치우고 나면 엄마는 늘 뒤양간 가마니틀을 켰다.

'한철 장사 가마니 팔아 푼돈 모아 태산을 쌓을지니'

치익 치익 척척 척척, 가마니 짜는 소리가 무거운 밤을 이고 새벽을 걸어서 나왔다.

사시사철 호야등 남폿불이 안방 쪽문에 외로이 어른거렸다.


아침을 먹고 있을 때였다.

양철대문 소리가 났다.

눈꼽재기창으로 모래밭 고모할매집 아지매가 설핏 들어왔다.

제일 늦게 밥상에 앉은 엄마, 밥 한술 얼른 떠 넘기고 황급히 방을 나갔다.

"형님, 일찍 건너오셨네예"

"골이 깊다 아니가, 서둘러 가야재"

뭔 약속이 된 듯하였다.

급히 정재로 내려간 엄마, 된장 한 숟갈 찍어 넣고 주먹밥을 둘둘 뭉쳐 바뿌재에 싸서 대문을 나섰다.

"대강 치워놓고 학교 가래이" 말을 남기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강변에 매어둔 염소를 찾아 풀을 먹여 헛간에 들여다 놨다.

설거지통에 담겨 있는 그릇은 씻어 살강에 얹혀놨다.

방청소도 해 뒀다.

땅거미에 등 떠밀려 밖에서 놀던 동생이 돌아왔다.

모두가 제 집을 찾아드는데 산나물 뜯으러 간 엄마만 감감무소식이다.

"너거 엄마 와이래 안 오노?"

"산짐승이라도 만나면 큰일인데"

사랑방에서 혼잣말을 하던 아버지, 밑창이 다 닳은 검정고무신을 들었다 놨다 하였다.


마루에 앉아 이제나 저제나 엄마를 기다리던 때,

대문을 들락날락하던 아버지, 밥을 하라 일렸다.

소죽은 끓여봤어도 내 그때까지 밥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철렁하였다.

"곧 있으면 어두버지는데 밥이라도 해 놔야 안 되겠나"

말만 내리면 척척 잘도 해내는 언니들이라 나도 그럴 거라 여긴 걸 테지.

해는 이미 저물었고 기척 없는 엄마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깜냥이 안 되어도 일단 부딪혀 볼 수밖에.

'까짓것 내 한 번 해 봄이지'


드므에서 쌀을 서너 종구래기 퍼내 눈에 보이는 돌을 골라냈다.

박바가치에 뽀닥뽀닥 문질러 씻었다.

쌀뜨물은 소죽 끓일 때 쓰게 구정물통에 부어 두었다.

동솥에 밥을 안쳤다.

'밥물을 어이 잡을까' 까까머리 민머리 검은 머리 셋이 귀동냥한 설을 풀어 얼추 대강 잡았다.

솔갈비, 밤갈비가 한데 섞인 한 줌 불살개에 성냥불을 붙여

잔가지 나무를 톡톡 분질러 얹어 여린 불을 살려

둥그리를 얼키설키 포개 성난 불을 활활 키웠다.

보글보글 부글부글 쌀알 구르는 소리

뿌룩뿌룩 무쇠 솥뚜껑 방귀귀는 소리

솔솔 술술 하얀 김이 쉼 없이 새어 나왔다.

'이쯤 불을 잡으면 되겠지'

부지깽이를 툭툭 두들겨 불길이 잦아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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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 후에 행주를 빨아 솥뚜껑을 싹싹 닦은 후 뚜껑을 열어 무쇠 주걱으로 밥을 젓었다.

주걱에 붙은 밥풀을 떼서 맛을 보았다.

밥알이 설컹살캉, 생캉탱캉 씹혔다.

아침에 먹었던 밥과는 사뭇 달랐다.

말로만 들어 본 삼층밥이었다.

'이만한 게 어디야. 살살 걷어 솎아 퍼면 먹을 수는 있을 거다'

신김치 빨아 조물조물 무치고, 아침에 먹던 찌개 데우고 밥만 퍼면 되게 상을 봐뒀다.


곳곳에 전깃불을 밝혔다.

뿌연 백열등 전구 아래 둥근 어둠이 밀려났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고 있었다.

대문 소리가 벌컥 났다.

엄마, 고래등 같은 나물 보따리를 이고 들어왔다.

매일 보는 엄마, 아침까지 봤던 엄만데도 얼마나 반갑던지 쫓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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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고프재? 얼른 밥 해묵자" 엄마의 첫마디가 그랬다.

"밥은 해놨고 엄마 오면 같이 먹을라꼬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무르익은 저녁,

네 식구가 밥상에 둘러앉았다.

타고 질고 되고 설익은 밥이 한데 모인 요상한 밥.

졸라대는 뱃고동 소리에 허겁, 밥 한술을 크게 떴다.

뽀작, 어금니가 디딜방아를 찧었다.

뿌직, 아버지 입에도 돌소리가 났다.

'아차!' 조리로 쌀을 일어야 함을 놓쳤다.

아버지 눈치를 살금 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 고함을 건너뛰었다.

까만 돌, 흰 돌, 누런 돌, 이밥저밥 할 것 없이 하나 둘 셋...

젓가락으로 밥을 헤집어 숨은 돌을 싹 잡아냈다.

숟가락에 듬뿍, 입이 뿔룩뿔룩 움직였다.

젓가락에 담뿍, 꿀맛이었다.

밥상에 잔잔한 웃음이 퍼졌다.


"내일 장에 가가 나물 팔아 돈 사면 제삿장은 볼 수 있을 거다"

"아이고마, 이래 또 한 고개를 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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