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전쟁

제2부 실리 외교의 전쟁터 – 무역, 돈, 기술

by한시을

8화 기술 혁명과 권력 이동: 반도체와 AI가 만드는 새로운 질서


▌미국이 중국을 향한 반도체 봉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10월 '반도체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한 이후 지속적으로 규제를 확대해 왔다. 2024년에는 네덜란드 ASML의 중국향 EUV 장비 수출이 완전 중단됐고, 한국과 대만 기업들에게도 중국과의 협력 제한이 강화됐다. 21세기 패권 경쟁의 핵심이 군사력에서 기술력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기술이 바꾼 권력의 지도


역사상 패권은 항상 결정적 기술을 장악한 세력이 차지했다.


고대에는 청동기술, 중세에는 화약기술, 근세에는 증기기관이 문명의 판도를 바꿨다. 20세기에는 핵기술과 컴퓨터가 새로운 권력구조를 만들어냈다.


21세기에는 반도체와 AI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가 2023년 5,740억 달러를 기록했다. 자동차, 스마트폰, 데이터센터부터 군사장비까지 현대 문명의 모든 것이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변화와 적응의 시대에 기술이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역사를 보면 비슷한 전환점이 있었다.


철이 바꾼 춘추전국시대의 권력 지도


기원전 8세기경, 중원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철기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청동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청동으로 만든 무기와 농기구, 청동으로 주조한 화폐와 제기가 권력의 상징이었다. 청동 기술을 독점한 주나라 왕실과 제후들이 질서를 유지했다.


하지만 철의 등장은 모든 것을 바꿨다. 《고공기》에 따르면 철로 만든 농기구는 청동 농기구보다 생산성이 3배 높았다. 철제 무기는 청동 무기를 압도했다. 더 중요한 것은 철광석이 청동보다 훨씬 흔했다는 점이다.


청동 시대에는 구리와 주석을 구해서 합금을 만드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원료도 희귀했고 기술도 어려웠다. 따라서 소수만이 청동 기술을 독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철은 달랐다. 철광석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었고, 제철 기술도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한비자》는 "철의 보급으로 농민도 좋은 농기구를 쓸 수 있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당시의 목소리] "철기의 등장으로 소국도 강국과 맞설 수 있는 무기를 갖게 되었다. 기술의 민주화가 권력의 분산을 가져왔다." - 《관자》


결과는 극적이었다. 기존 질서가 완전히 해체되었다.


기술 혁신이 만든 권력 분산


철기 혁명의 가장 큰 결과는 권력의 분산이었다.


청동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이 기술을 독점하며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했다. 제후들도 왕실에 의존해야만 청동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철기가 보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각 제후국이 독자적으로 철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왕실의 기술 독점이 무너진 것이다.


더 나아가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했다. 기존 귀족이 아닌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철기 생산을 통해 부와 권력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의 여불위 같은 상인 출신 정치가들이 나타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사기》에 따르면 철기 보급 이후 춘추시대 170여 개 소국이 전국시대 7개 강국으로 재편되었다. 기술 혁신이 완전히 새로운 정치 지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현재 반도체와 AI가 만들어내는 변화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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