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 사랑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치열하고 찬란한 실존의 문법
이제 그만 역사적 사랑 서사의 열린 문을 닫고자 한다. 고대 이집트의 사막에서 시작해, 중세의 캄캄한 수녀원을 거쳐, 혁명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단두대와 광기 어린 현대의 캔버스 앞까지. 위대하고 잔인한 시간의 흐름 속, 연인들이 피 흘리며 걸어간 운명의 궤적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역사 속 거장들이 온몸으로 써 내려간 사랑은, 결코 디즈니 동화 속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야만과 부조리, 그리고 자신의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아로새겨진 잔혹한 흉살(凶殺)들과 벌인 피투성이의 육박전이었다.
결핍과 광기, 배신과 죽음이 난무했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 서사극은, 사랑의 낭만적 환상을 무참히 찢어발기는 동시에 가장 거룩한 질문 하나를 우리 앞에 던져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기어이 사랑을 해야만 하는가."
인문학과 심리학, 그리고 우주의 이치인 명리학이 한데 얽혀 빚어낸 이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사랑의 참된 의미와 현대인이 잃어버린 실존적 가치를 다시 묻는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인간이 자신의 억눌린 무의식, 즉 '그림자(Shadow)'를 타인에게 투사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미친 듯이 끌리는 이유는 그 사람이 완벽해서가 아니다. 내 영혼의 가장 결핍되고 병든 조각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명리학의 이치도 정확히 이와 맞닿아 있다. 우리는 왜 나를 편안하게 해 줄 인연을 두고, 나를 무자비하게 억압하는 관살(官殺)이나, 서로를 부수고 찌르는 충(沖)과 원진(怨嗔)의 인연에게 속수무바카라으로 빨려 들어가는가. 그것은 자아가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안전한 온실 속의 화초(합·合)로는 영혼이 각성할 수 없다. 슈만과 클라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가 증명하듯, 때로 사랑은 두 존재가 정면으로 부딪혀(충·沖) 서로의 껍질을 박살 내고 뼈와 살을 재조립하는 끔찍한 연금술이다. 사랑은 나를 지키는 방어막이 아니라, 나의 가장 비루한 밑바닥을 까발려 기어이 나를 다른 차원의 인간으로 변이(Mutation)시키는 우주의 혹독한 채찍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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