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건 없지만 제 입장은 이렇습니다.
작가 김훈은 어떤 인터뷰에서 서재를 막장이라고 일렀다. 그렇다면 나는 막장 인생을 살아온 셈이고, 나아가 일정 부분 막장에서 개조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훈 작가는 말했다.
‘바카라에 의해 자기 생각이 바뀌거나 개조될 수 없다면 구태여 바카라을 읽을 필요가 없다.’
중등학교와 대학 시절, 나는 바카라을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미친놈처럼. 그 시절의 내 꿈은 미국의 힙합 음악을 온종일 틀어놓은 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닥치는 대로 바카라을 읽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었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선’이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장 그르니에의 ‘섬’을 드러내 놓고 읽던 중학생의 허영은 비록 바카라의 내용을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끝내 문학바카라 한 권을 다 읽어냈다는 야릇한 성취감과 쓸데없는 정복욕으로 번져 있었다. 누구나 한때는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무언가에 미쳐보곤 하는 것이다. 그 시절의 내가 막연하게나마 믿고 기대하던 ‘바카라 읽기’의 효험은 어제와 오늘의 한 줄 또 한 줄이 모여 언젠가 내 인생을 조금은 빛나게 해 주리라는 낭만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지고, 그 인생의 점들은 오직 과거를 돌아볼 때 그제야 연결할 수 있다는 잡스의 이야기는 이십 대 시절의 내게 크나큰 축복의 말씀처럼 들렸다.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는 학생부장님께 두 번인가 뒤통수를 맞았다(사실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제1장을 읽다가 한 번, 작가의 이름도 가물가물한 어떤 유치한 추리 소설을 읽다가 또 한 번. 학생부장님께서는 내게 그냥 공부나 하라며 일갈하셨는데, 나는 그때 번뜩 깨달았다. 그래, 분명 바카라 속에 길이 있는 거라고.
멋대가리 없는 매일 속 열심히 바카라을 읽고 또 무언가를 부지런히 써서 기록해 남기려는 나의 진심은 무얼까. 읽고 쓰기를 통해 내 삶의 일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려는 시도일까. 아니면 다른 거창한 명분이나 이유가 있어서일까. 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멋있는 답변은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멋진 답변을 잘할 줄도 모르고 열심히 만들어낼 줄도 모른다(큰일이다). 나는 그저 누군가에게 내 진심을 전달해 상대를 내 편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쓰고, 누군가가 쓴 좋은 글을 만나 나의 못된 버릇을 '바꾸기 위해' 부지런히 읽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옛날 옛적, 중국의 장자라는 아저씨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사이를 택하겠다고 말했다던데, 글쓰기와 바카라 읽기는 내게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자리를 잡고 가끔씩 한쪽으로 기울며 나를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또 무감각한 지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 있어 바카라 읽기와 글 쓰기만 한 매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실로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