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지 않은 날

(대학생활 6부 - 끝까지 앉아 있었다)

by류정uk


재시험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불길했다.

알람보다 먼저 깨어났고, 심장은 내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혼자 뛰고 있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재난 영화는 항상 조용한 아침으로 시작하니까.

부엌에서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내가 왜 또 시험을 보고 있지?’


일본학 전공 선택.

무리해서 따낸 A-Level.

서른일곱에 대학 입학.

범인은 명확했다.

모두 나였다.


시험을 앞두고 교수님은 네 개의 논술 주제를 주셨다.

그중 두 개만 준비하면 된다고 하셨다.

지난번 백지를 냈던 나를 기억하신 걸까.

그 생각에 가슴이 잠시 울컥했다.


나는 어린 시절 웅변대회에서 박수받던 기억을 끌어와 두 개를 골랐다. 며칠에 걸쳐 웅변 원고를 쓰듯 답안을 에세이로 완성해 통째로 외웠다.


질문과 답은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시험장에서 제대로 떠오를지는 알 수 없었다. 영어로 된 논술을 끝까지 써낼 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시험지가 돌기 전, 나는 숨을 고르며 이번만큼은 기억이 나기를 빌었다.



자리 배정표를 확인했다.


맨 앞자리.

왜 하필 맨 앞이냐.

감독의 악의처럼 느껴졌다.


시험지가 내려오는 순간, 내 인생도 같이 내려앉았다.

옆 사람의 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탁, 탁, 탁.

‘저 사람은 벌써 세 문제를 끝냈겠지….’

나는 아직 첫 문장도 못 썼는데.


논술 문제.

“설명하시오.”

지금 내게 설명을 요구한다고?

이건 설명이 아니라 고백이 필요한 순간인데.


그 순간 부엌 벽에 붙여 놓고 매일 외우던 조사들이 떠올랐다.

は……が……を…….

그런데 머릿속에서 그것들이 하나씩 손을 흔들며 도망가는 상상이 스쳤다.

“우린 집에 있다!”

웃을 뻔했다.

웃으면 안 된다.


문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였다.

알긴 안다.

NHK도 보고, 소설도 읽고, 드라마도 봤다.

그런데 머릿속 지식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 나가?’

‘아니, 네가 먼저.’


결국 손을 움직였다.

손은 점점 빨라졌고, 글씨는 의사만 알아볼 수 있는 필기체로 변했다.

번역도 아니고, 제대로 된 논술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작은 증명서였다.

끝까지 앉아 있었다.

끝까지 썼다.

시험지를 던지지도 않았고, 중간에 나가지도 않았다.



시험 종료.


펜을 내려놓는 순간, 영화가 끝난 것처럼 모든 소리가 돌아왔다.

바깥으로 나오니 햇빛은 평범했고, 바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굴을 스쳤다.

세상은 태연했다.

그런데 내 손끝은 아직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웃었다.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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