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을 덮으며
바람이 차가워지는 계절이 오면 유독 문장들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걸어온 내력이 마른 꽃다발보다 가볍게 느껴지고, 삶의 핑경 소리가 아득해질 때 나는 가만히 바카라장을 넘긴다.
등단 40년을 앞두고 아홉 번째 시집을 펴낸 장석남 시인의 『내가 사랑한 거짓말』을 품에 안았다. 양평 용문산 자락에서 고요히 시를 벼려온 시인의 문장들은, 가뭄 탄 밭처럼 바짝 마른 마음 위에 순전한 이슬처럼 내려앉는다.
시인은 시집 속에서 연꽃을 심으며 묻는다.
"물에 노래를 심다니요
그것도 지금 노래가 아니라 훗날
하지 때의 그 노래를 심다니요"
— 「연꽃 심을 때」 중에서
물에 노래를 심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당장 눈앞의 결실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순환하고 여름이 깊어질 때 비로소 울려 퍼질 그 무언가를 묵묵히 기다리는 마음. 시인의 눈에는 씨앗을 뿌리는 일조차 미래의 노래를 심는 거룩한 농사다.
가을 연밭에 이르러 꽃은 다 떠나고 고개 꺾은 참담한 그림자만 남았을 때도 시인은 조용히 차의 시동을 끄고 내려앉는다. 소나기의 멋진 코러스는 없지만, 그 한적함과 쓸쓸함마저도 몇 년에 걸친 연 농사의 커다란 수확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눈길. 그 깊은 태도 앞에서 내가 다급히 쥐고 있던 일상의 조바심들이 스르르 풀어지는 듯했다.
시집을 읽다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페이지는 아버지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시였다. 서랍 속 거미줄 아래 묵혀 있던 아버지의 목도장.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어보니 성과 이름이 문턱처럼 닳아 있었다.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닮았으니"
— 「목도장」 중에서
평생 자식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도장이 닳도록 이름을 찍으며 견뎌냈을 시간. 그 닳아버린 성함 석 자 뒤에는 얼마나 많은 고단함과 침묵의 서사가 담겨 있었을까.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의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았다는 시인의 문장을 읽으며, 나 역시 지나온 내 어버이의 삶과 내가 지어온 생의 흔적들을 가만히 되짚어보았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
— 「내가 사랑한 거짓말」 중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생은 어쩌면 수많은 상처와 버려짐, 그리고 어쩌다 마주친 구조로 얼룩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나는 살아있고, 살았으며, 얼마간 더 살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일. 시인은 그것을 '내가 사랑한 거짓말'이라 부르며 나지막이 자서전을 꾸민다.
보라색 거짓말이 피어나고 붉은 거짓말이 봉오리를 맺는 정원. 어쩌면 우리가 시를 읽고 글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현실의 참혹함이나 무거움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아름다운 시선으로 나를 보듬고 세상에 물을 주는 마법 같은 일 말이다.
"꽃의 무게로 일생이 휘는 일이여"라는 구절처럼, 생의 무게는 때로 한없이 무겁다. 하지만 그 무거움은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업었을 때 느껴지는 상기된 피어남의 무게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 나지막이 시인의 노래를 청하며 차분해진 창가를 바라본다. 투명해질 때까지 창을 닦듯 마음을 비워내는 시간. 시집 한 권이 건넨 깊은 온기 덕분에, 다가올 계절이 조금은 덜 춥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