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잔상이 남는 것은 완벽하게 짜인 시나리오나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었다. 덥수룩한 포수 차림으로 나타나 엉뚱한 표정으로 20년 전의 가요톱10 왕좌를 꿈꾸던 '발라더 최성곤(오정세 분)'의 기상천외한 존재감, 그리고 탈진해 엉망진창이 된 무대 위에서 구토하면서도 끝내 마이크를 놓지 않던 그 우스꽝스럽고도 서글픈 집념이었다.
넷플릭스 '오늘 대한민국의 TOP 10 영화' 1위(1일 기준)에 오른 손재곤 감독의 신작 <와일드 씽(Wild Sing)>은 개연성이 치밀하거나 세련된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접한 관객들 사이에서는 2000년대 초반 배경에 2000년대 중반 출시된 차량이나 LCD TV가 등장한다는 소소한 고증 오류가 지적되기도 하고, 후반부 사건 전개 역시 시트콤적 과장과 소란스러움에 의존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대체 왜 이런 영화가 1위일까?'라는 의구심으로 시작했던 시선은, 어느새 화면 속 B급 인물들이 벌이는 무모한 질주에 쓸데없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상한 경험으로 착지한다. 그 중심에는 세월의 때가 묻었지만 여전히 삶의 무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절절한 열망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만에 잡은 '마지막 밧줄'
▲넷플릭스 영화 <와일드 씽> 포스터넷플릭스
영화는 2000년대 초반,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승승장구하다가 하루아침에 표절과 음란 파문이라는 메가톤급 스캔들에 휘말려 해체된 3인조 혼성 댄스 그룹 '트라이앵글'의 궤적을 훑는다. 사랑의 설렘을 노래한 데뷔곡 '러브 이즈 Love is'로 음악 방송 차트를 휩쓸고, 2집 '샤우트 잇 아웃 Shout it out'으로 정상의 자리에 오르던 순간, 그들의 운명은 역대급 사건들과 얽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20년이 흐른 현재, 이들의 삶은 고단하기 짝이 없다. 리더 황현우(강동원 분)는 라디오 시청자 게시판의 악플을 빌미로 개편 철도 아닌데 방송국에서 쫓겨나는 생계형 방송인이다. 래퍼 구상구(엄태구 분)는 혼자 잘해보겠다고 낸 솔로 앨범 두 장을 대차게 말아먹고, 지하 창고에 쌓인 악성 재고 앨범 박스 옆에서 울적해하는 빚더미 보험설계사다. 홍일점 변도미(박지현 분)는 시가 총액 1조 3천억 원에 달하는 재벌가 며느리가 되었지만, 화면 너머로 사사건건 잔소리를 퍼붓는 시어머니 아래서 숨 막히는 무료함을 견디며 산다.
여기에 트라이앵글의 그늘에 가려 만년 2위에 머물다 뒤풀이 파티의 마약 파문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20년의 세월을 날려버린 비운의 발라더 최성곤까지. 그야말로 '완벽하게 실패한 인생들'의 집합소다.
영화의 진짜 동력은 이 시시한 인생들이 강원 엑스포 유치 기원 콘서트라는, 겨우 쥔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다시 모이면서 작동한다. 20년 전 자신들을 버리고 도주했던 사기꾼 제작자 박용구(신하균 분)와의 우연한 재회, 이를 응징하려다 벌어지는 교통사고,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경찰과의 황당한 추격전, 산속에서 만난 야생 멧돼지와의 대치까지.
온갖 나쁜 조건이 겹치며 "너희에게 줄 기회 따위는 더 이상 없다"고 세상이 으름장을 놓을 때, 현우는 망가진 차 옆 도로 한복판에서 쓸쓸히 헤드스핀을 돌다 엎어진 뒤 이렇게 외친다.
"일생에 기회가 세 번밖에 없다고? 너무 적잖아, 너무 억울하잖아! 살면서 세 번쯤 실패할 수도 있는 거지! 기회가 수십 번 돼야 되는 거 아니야? 외계인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오늘 무대에 서는 거야!"
이 웅변에 가까운 대사는 <와일드 씽>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본질이다.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기 힘든 세상, 실패한 사람에게 더 이상 패자부활전을 허락하지 않는 각박한 슬롯를 향해 던지는 루저들의 유쾌하고도 눈물겨운 빽빽거림이다.
'오정세'라는 치트 키
영화는 관객들 사이에서 언급되는 시대적 고증 오류나 시트콤적 과장 같은 완성도 면의 허점들을 품고 있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끝까지 긍정하게 만드는 것은 온전히 배우들이 쏟아낸 진정성 덕분이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90년대 아이돌 특유의 시선 처리와 안무, 그리고 고난도 헤드스핀을 몸 사리지 않고 소화한 강동원은 단단했던 미남 배우의 틀을 깨고 친근한 생활형 캐릭터를 완성했다. 거친 외모와 저음의 목소리 뒤에 랩에 대한 애정과 상처를 감춘 엄태구의 반전 매력, 그리고 이효리를 오마주하며 당대 탑여가수의 상큼함과 걸크러시를 넘나든 박지현의 호흡 역시 기분 좋은 에너지로 극을 채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확실한 '치트키'는 단연 오정세다. 이동진 평론가가 "오정세가 좋아, 니가 잘해서 좋아"라는 한 줄 평을 남겼듯, 포수 차림으로 나타나 "노래가 하고 싶었습니다"라며 굵은 눈물을 흘리거나, 탈진한 상태로 빙글빙글 돌며 토를 하면서도 무대를 완주하는 그의 모습은 코미디를 넘어 순간순간 절절함을 선사한다.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인물이 가진 노래에 대한 한을 진정성 있게 짚어낸 오정세의 연기는 영화의 감정적 기틀을 단단히 받친다.
온갖 난관을 뚫고 마침내 무대에 오른 트라이앵글은 방송국 PD의 '원곡 그대로' 부르라는 지시를 거침없이 깨부순다. 상구는 보험설계사로 일하며 밤마다 적어 내려간 자기 삶의 랩을 목이 터지라 뱉어내고, 도미는 막힌 가슴을 뚫어버릴 듯한 애드리브 화음을 얹으며, 현우는 삐걱거리는 몸을 던져 마지막 헤드스핀 한다.
비록 엔딩 멘트로 "강원 엑스포" 대신 "강원 올림픽 유치"를 외치는 대형 사고를 치며 끝까지 엉성함을 버리지 못하지만, 인이어를 빼고 관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을 직접 들으며 눈물 흘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 감돈다. 한때 반짝였다가 사라진 이들이 다시 한번 자기 이름을 증명해 낸 순간이다.
영화의 마무리는 교훈적인 척 포장하지 않는다. 도미는 순진하게 옛날로 돌아가는 대신, 재벌가의 자본을 활용해 멤버들의 프로듀서로 변신한다. 도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최성곤을 보컬로 영입한 '뉴 트라이앵글'은 여전히 촌스럽고, 여전히 태블릿 너머의 대표님에게 닦달당하며 화보를 찍는다. 거창한 신분 상승이나 완벽한 인생 역전 따위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어찌 되었든 자신들이 선택한 무대 위에서 계속해서 노래하고 춤춘다.
<와일드 씽>이 넷플릭스 차트 최상단을 지키는 이유는 킬링타임용 웃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가며 몇 번이고 고꾸라지고, 세상의 조롱을 받으며, '만년 2위'나 '잊혀진 존재'로 밀려난 이 세상의 수많은 '황현우'와 '최성곤'들에게 이 영화가 작지만 뜨거운 응원을 건네기 때문이 아닐까.
실수 좀 하면 어떤가. 세상이 정해놓은 기회가 세 번뿐이면 또 어떤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일지라도, 오늘 밤 내 삶의 무대 위에서 내가 원하는 박자에 맞춰 실컷 춤 한 번 추면 그것으로 충분하다.